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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시위로 지고 새는 공화국 대한민국
입력 2018-11-29 06:00
철학자·칼럼니스트

인간에게는 표현의 욕구가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무슨 깊은 지혜나 폭넓은 공감을 얻을 만한 감정이 아니더라도 그러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날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꼭 표현하고 싶은데 그 길이 막히면 한(恨)이 되고 병이 나기도 한다. ‘화병(火病)’이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집회 시위, 소중한 표현의 자유이지만

어떤 맥락에서라도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하다. 무슨 생각이나 느낌이든지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기본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니까, 심지어 사람들이 황당한 발상이나 현실 인식, 유치한 느낌도 토로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기 위해 국가는 힘써야 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무제한 허용될 수 없다. 다른 자유나 권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의 범위는 다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지점까지라고 경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을 초래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자유를 누리는 일이 허용될 수 없다. 가령, 군중이 긴급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꽉 들어찬 극장에서 “불이야!”하고 외쳐 댈 자유는 전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외치고 싶은 사람의 동기와 욕구가 설령 순수하더라도 그런 자유를 허용했다가는 극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불상사가 초래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표현의 자유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법이란 어떠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최대한 향유, 행사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런 과정에서 다른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 역시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공적(公的) 장치인 것이다.

주인보다 객이 설치는 국가사업현장

오늘날 우리나라 곳곳의 국가적 사업 현장에서는 시위가 벌어진다. 특히 국가사업과 사업시행 지역 주민의 이해가 상충하는 곳에서는 전문 시위대가 이해 당사자인 주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직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시위를 벌인다. 그런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에서 상제보다 문상객이나 구경꾼이 더 섧게 통곡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금년 11월 중순까지 민주노총이 주최한 집회가 6600건을 넘었다. 민노총이 우리나라 그 어디에서든 매일 21건씩 집회하고 시위를 벌였다는 뜻이다. 민노총은 대검찰청 청사와 국회의사당에도 과감하게(!) 돌진하여 기습 시위를 벌였다. 보통 국민의 상식으론 대검찰청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공권력을 지닌 곳이다. 이런 대검찰청 청사에서 점거 시위가 벌어졌을 때 검찰청장은 조용히(!) 점잖게 뒷문으로 퇴근한 것으로 보도됐다. 민노총은 얼마 전, 21일에도 탄력근로제 확대 반대를 요구하면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총파업 시위를 벌였다.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 다뤄지지 않는 사항은 없다. 사소해 보이는 민원사항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경제, 안보, 외교, 교육, 언론, 종교, 문화 등 그야말로 모든 의제가 망라된다. 주장 내용 역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하다. 시위대의 구호나 요구사항 역시 과감한 수준을 넘어 그 어떤 권력이나 기관, 법률에도 코웃음 치는 지경이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상당히 오만한 발언조차 거침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여러 사실로 볼 때 오늘의 대한민국은 시위공화국임이 분명하다.

시위(示威)는 말 그대로 위력이나 기세를 과시하는 의사 표현 방식이다. 대체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시위를 벌이는 주체 측은 ‘세(勢)싸움’ ‘기(氣)싸움’에서 승리해야 주장과 힘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위법 시위도 세월이 흐르면 주동자나 관련자들이 ‘영웅이 되어 무사 귀환’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확실한(!) 경험에 비추어 시위가 과격한 양상을 띠는 것도 대체적인 특징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원들이 유성기업 임원을 1시간 동안 폭행하던 22일 출동한 경찰이 노조원에 가로막혀 사무실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유성기업 제공
민노총 위법에 손놓은 공권력도 문제

대한민국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엄연히 있다. 이 법은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집회와 시위를 통해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단서가 분명히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주장하고 반박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모든 과정에서 실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위 주체의 정치 성향이나 표현 내용과 전혀 상관없다. 그 누구도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자유나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법의 근본정신이다. 법을 어기는 시위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엄정한 법의 제재를 받아 마땅하다.

근래에 시위가 법의 테두리를 넘으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제법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적법한 시위가 오히려 드물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 될 것이다. 탈법 위법 시위를 밥 먹듯이 벌이는 사람들은, 거창한 국가적 문제로 시위를 하다 보면 일반 시민의 일상적 자유나 권리가 침해될 수도 있는 게 아니냐고 여기는 것 같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모든 국민에게는 시위의 자유와 권리가 있듯이, 시위장 건물과 주변에서 사무를 보고 장사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할 자유와 권리가, 또한 시위장 옆 도로를 방해받지 않고 통행할 자유와 권리가 분명히 있다. 시위의 자유와 권리는 크고 중요하지만 영업이나 통행의 자유와 권리는 무시될 수도 있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극히 위험천만한 독선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경찰 역시 엄격히 법을 지켜야 한다. 위법 시위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해야 한다. 경찰이 명백한 위법 시위를 눈감아주는 것은 직무유기와 다름없다. 경찰이, 시위대가 ‘깽판’치는 걸 빤히 보면서도 ‘자제’와 ‘자진 해산’만 애걸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이럴 땐 “이게 나라냐?”라는 통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시위자든 경찰이든 모두 법을 엄수해야 하며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시민에게도 시위자와 동등한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명제는 싱거울 정도로 당연하고 자명하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간과, 망각되는 일이 너무나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제 좀 더 ‘열린사회’를 만들어 가야

어떻게 하면 위압적이고 시끌벅적한 이런 시위 만능, 시위 만연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풍토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목소리가 커야 말발이 서고 먹혀든다는 통념이 강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맞는 측면이 여전히 많다. 고지식하게, 조용히 말하면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한 가지 방안은 토론문화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통령도 취임 초에 국무회의는 국정에 관한 열띤 토론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토론은 외형상의 토론에 불과한 경우가 흔하다. 토론을 통해 자기와 다른 견해를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보다 발전된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인신공격이나 말꼬리 잡기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집회와 시위로 날이 새는 것은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귀착된다. 경청의 자세나 토론이야말로 소통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니까.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치에서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면 시위처럼 요란스럽고 거친 의사 표현 방식도 점차 퇴조할 것이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시위공화국임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랑스럽지 못한 별명을 벗어버리고 보통 국민이 보다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명실상부한 열린사회로 바뀌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참으로 우울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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