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글] 나의 운세, 문창도화(文昌桃花)

입력 2018-08-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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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집사람이 친구와 더불어 먼 데까지 점을 보러 갔다. 내 생년월일과 생시를 대고 나서 점쟁이 도사와 집사람이 나눈 대화를 집사람 친구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은퇴한 뒤의 바깥양반 운세가 참 좋소. 문창도화(文昌桃花)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고, 도화를 즐긴다. 그거요.”

“도화라니요?”

“도화살이라는 말이 있잖소? 쉽게 말해서 바람을 피우겠다, 그 말이요.”

“에이. 딴 건 몰라도 그이는 그 재주는 없어요.”

집사람 친구는 나에게 따졌다.

“점쟁이가 도화 점괘를 설명하며 남편이 바람을 피울 거라고 하는데도 그 아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김 교수는 그동안 세상을 잘못 산 거 아니에요?”

내가 잘 살았는지 잘못 살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아직 들킨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은퇴 이후의 운세가 문창도화라니 나는 속으로 환호작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점쟁이 도사의 후속 대화가 나를 고무했다. 책을 써서 떼돈을 버는데 여자들이 가만두겠느냐고 강조하더라는 것이다. 기막힌 운세가 아닌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던 음모를 실현하기로 다짐했다. 소설 쓰기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교수가 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지만, 기자생활을 마치고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 나의 어렸을 적 꿈이었다. 은퇴하는 나이에 기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소설이야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소설을 쓰려면 서울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서울에 머물다가는 이러저러한 일에 얽혀 엄벙덤벙 세월을 허송할 게 빤했다. 그래. 시골로 가자. 갈 바에야 먼 데로 가자. 그래서 고른 데가 보길도였다.

보길도로 내려가자고 하자 집사람은 길길이 뛰었다. 시골에서 자란 친구들은 신랑 잘 만나 다들 서울에 사는데, 서울에서 자란 나는 말년에 남편 잘못 만난 죄를 곱씹으며 시골에서, 그것도 섬에서 살란 말이냐고 대들었다. 나는 노량진도 서울이냐고 대꾸했다가 집사람 독만 잔뜩 오르게 했다. 섬으로 내려오지 않겠다는 집사람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오지 않겠다는 바로 그 조건이 좋다며, 나는 은퇴하자마자 보길도에 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섬 생활이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보길도 생활은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집사람이 아닌, 다른 반려를 만나 함께 산 덕분이었다. 고구려 고승 담징 스님이 바로 나의 동거인이었다. 나는 그이와 함께 불경을 읽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바닷가를 걷기도 하며 3년을 보내고, 드디어 장편소설 ‘담징’을 냈다. 소설꾼도 절필하는 나이에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이 5쇄를 했다는 사실은 뿌듯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떼돈을 벌고 바람을 피운다는 운세를 체현하기 위해 나는 지금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은 끝나가지만 떼돈이나 도화의 꿈은 아무래도 꿈으로 끝날 것만 같다. 절망의 근원에 집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집사람이 보길도로 내려와 살아보더니 요즘은 나보다 더 보길도를 좋아한다. 집사람이 있어 생활하기는 편하지만, 소설을 쓰는 데는 집사람의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다. 좁은 공간에 집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상력이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자전적 연애소설을 쓰고 있는데, 도무지 이야기가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그럼 도화의 점괘는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화를 의역하면 바람이 되지만, 직역하면 도화는 그저 복숭아꽃이다. 집에 여러 종의 묘목을 심었는데 다른 나무는 많이 죽었어도 복숭아나무는 잘도 자랐다. 복숭아꽃도 보고 열매도 따 먹으며 글을 쓰고 사니까, 점괘는 어김없이 들어맞은 셈이다. 점쟁이 도사를 만나면 의역에 신중해야 한다고 충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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