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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철부지의 반성
입력 2018-06-28 10:48

올해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갔다. 세월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해 빨라진다고 했던가. “열 살 아이에게 1년은 인생의 ‘10분의 1’이지만, 쉰 살 중년에게 1년은 인생의 ‘50분의 1’이어서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내 몸의 움직임이 느려질수록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새해 첫날 마음먹은 것을 지키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두 가지를 결심했었다.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 일주일에 사흘 이상 운동하기, 그리고 충북 청주에 계신 엄마한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화하기. 그런데 제 몸뚱이를 위한 운동은 열심히 했는데, 엄마한테 전화하기는 지키지 못했다. 일주일은커녕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안 한 것 같다.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특별한 용건이 없으니까, 내가 아니라도 언니·오빠들이 잘하니까…. 부끄럽게도 핑계 대기 도사만 되었다.

나잇값도 못하는 철부지로 반년을 보냈나 보다. ‘엄마에게 전화하기’를 다시 결심한다. 마음먹는 데는 철이 따로 없으니까. 남은 반년은 핑곗거리를 찾지 않고 꾸준히 지키리라.

‘철’이라는 말이 새삼 재미있게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철’을 한자로 생각하는데, 순우리말이다. 봄철, 여름철 등과 같이 자연현상에 따라 한 해를 구분하는 계절을 가리킨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 “철이 바뀌었다”고도 표현한다. 철은 또 한 해 중 어떤 일을 하기 딱 좋은 시기나 때를 뜻하기도 한다. “6월 말은 모내기 철이라서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다” 등으로 활용한다. “살아남은 과목들은 제철만 되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황순원, ‘카인의 후예’ 중)처럼 철은 제철과 같은 의미로 ‘알맞은 시절’을 가리키기도 한다.

‘철’이 정말 재미있는 이유는 사람에게 비유해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로 쓰인다는 점 때문이다. ‘철들다’, ‘철나다’가 바로 그것인데, 철이 들거나 철이 나는 건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철’이 어떤 일을 하기 딱 좋은 때임을 생각해 보면 ‘철들다’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풍부한 경험을 통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등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는 뜻일 게다.

반대로 제때를 알지 못해 어리석게 구는 사람은 ‘철부지’라고 한다.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지혜인 ‘철’에다, 알지 못한다는 한자 ‘부지(不知)’가 더해진 말이다. 한마디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철없는’ 사람이다. 철부지 부부를 ‘철딱서니 없는 아내와 철따구니 없는 남편’이라고 표현하는데, 철딱서니와 철따구니는 ‘철’의 속어다.

이 순간 “철나자 망령 난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철이 들 만하자 망령이 들었다’는 뜻으로, 지각없이 굴던 사람이 정신을 차려 일을 잘할 만하니까 망령이 들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이르는 비난조다. 무슨 일이든 때가 중요한 법. 어영부영하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 후회하지 말고 제때에 힘쓰라는 선조들의 가르침이 담겼다.

요즘 모 케이블방송사의 TV 특강쇼 ‘어쩌다 어른’을 즐겨 본다. 매주 분야별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지혜를 톡톡히 배우고 있다. 프로그램 제목에서 느끼는 바도 크다. 어쩌다 어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만 먹고 ‘철들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묻게 된다. 철없는 사람, 철모르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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