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명가의 전통과 교훈 - 하

입력 2017-11-2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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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오래 다닌 냉면집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꼭 가는 집이지만,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나보다 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언젠가는 손님이 줄어들 것이다. 변치 않는 맛도 중요하지만 변화하는 입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미국 3대 만년필 쉐퍼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그러지 못했다. 만년필 사용자의 일생 동안을 보증하는 펑생 보증, 위와 아래가 뾰족한 유선형, 플라스틱 재질은 쉐퍼가 자랑하는 공로이지만 지금 사람들의 시선은 쉐퍼에 있지 않다. 만년필의 부흥기, 모든 만년필 회사에 기회가 있었던 1980년대에 쉐퍼는 변화했어야 했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유행을 놓치지 않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 운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몽블랑, 펠리칸 등 독일 만년필의 시대이다. 하지만 만년필 역사 초기에 독일은 미국을 따라가는 편이었다. 미국에서 평생 보증이 유행하면 몇 년 뒤 독일에서 그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고 유행했다. 간혹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있었지만 큰 흐름은 1960년대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독일이 승자가 된 이유는 뭘까? 운보다는 뚝심이 큰 요인이다.

몽블랑을 보면 뚝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1906년 사업을 시작한 몽블랑은 보수적인 회사이다. 최고의 만년필 중 하나인 몽블랑149는 이것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다. 1952년에 출시된 149는 현재까지 생산되는 최장수 모델이다.

유선형 몸체에 펜촉이 크고 시원스러운 149는 오랜 기간 여러 회사들이 만들어낸 최고 중의 최고가 합쳐진 것들이다. 클립은 파커, 유선형 몸체는 쉐퍼, 잉크 충전은 펠리칸에서 왔다. 물론 뚜껑 꼭대기의 둥근 눈꽃 모양의 화이트 스타는 자기네 것이다. 70년이 다 되도록 거의 변함없는 모양으로 오늘도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삼합에 들어가는 홍어가 칠레산(産)이건 어디 산이건 맛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펠리칸은 경쟁자가 없는 몽블랑에 그나마 견제구를 날릴 수 있는 유일한 회사이다. 원래는 물감 등을 만들던 회사였다. 회사 이름이 펠리칸인 것은 소유했던 가문 중 펠리칸이 가문의 문장(紋章)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1837년에 설립됐지만 만년필 사업은 한참 뒤인 1929년에 시작하였다.

▲1930년대 몽블랑 광고

느닷없이 만년필 사업에 뛰어든 것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의 특허를 확보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방식은 몸통이 작아도 많은 잉크를 저장할 수 있어, 저장량 때문에 굳이 만년필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몽블랑이 따라 했고 미국에서도 몇몇 회사가 이 방식을 채택했다. 회사는 자신감을 얻어 만년필을 계속 생산했고, 1980년대 만년필 부흥기에 현대의 명작 M800을 출시하면서 지금의 위상(位相)이 형성되었다.

이 회사의 약점은 아이러니하게도 M800이다. 출시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이만큼 좋은 펜을 못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또 현재 생산되고 있는 M800의 품질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라에서 세금을 들여 선수촌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표선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펠리칸은 대표선수 관리를 잘해야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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