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25. 고타소랑(古陀炤娘)

입력 2017-11-0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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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 때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재위 654~661)인 김춘추(金春秋)의 딸이다. 남편은 이찬(伊?) 품석(品釋)으로, 대야주성(大耶州城, 현재의 경남 합천)의 군주(軍主)였다.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즉위한 지 11년이 되는 해인 642년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품석과 그의 처자, 즉 고타소랑과 자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는 물론 열전 중 김유신전(金庾信傳)과 죽죽전(竹竹傳)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죽죽은 대야주 사람으로,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642년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을 때, 신라인인 검일(黔日)이 백제군을 도와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예전에 자신의 예쁜 아내를 품석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원망이 적의 침입이라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배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야성 안은 이미 혼란에 빠졌고, 장군과 군사들은 사기가 꺾였다. 이때 품석의 보좌관 중 서천(西川)이 윤충에게 항복할 테니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였고, 윤충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중에는 백제를 믿으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품석은 성 문을 열어 신라의 병사들을 내보냈다.

품석도 나가려다가 장수와 병졸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에 대해 백제본기에서는 품석이 처자와 함께 성을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여서 그 머리를 잘라 백제의 왕도인 부여에 전하였다고 하였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비보를 듣고는 기둥에 기대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을 것을 결의하고 647년에 고구려에 청병(請兵)을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춘추는 당태종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연합이 이루어졌다. 후에 김유신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는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품석과 고타소랑의 뼈를 맞교환하였다.

고타소랑의 죽음은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인 김법민(金法敏)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김법민은 660년에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화를 내기를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에게 20년 동안이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대야성 전투는 나당연합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 성립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의 서막이었다. 고타소랑의 죽음은 그 결정적 계기였고, 명분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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