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인문경영] 逢變하지 말고 能變을

입력 2017-08-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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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봉변’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봉변(逢變)은 원래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를 능변(能變)과 봉변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예상치 못한 변화[變]를 만나서[逢] 어려움을 겪는 게 봉변이다. 미리 앞을 내다보며 능히[能] 변화[變]에 대응하는 것은 능변이다. 과연 일에서, 삶에서 봉변당하지 않고 능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전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가능했다. 회사는 안정을 주고, 구성원은 충성과 헌신으로 보답했다. 이제 예전과 다르다. 기업들은 성장을 넘어 성숙의 단계에 도달했다. 예전과 같은 교환거래의 법칙이 힘들다. 그런데도 몰입과 헌신을 요구한다. 일할 때는 주인처럼, 나눌 때는 노예처럼 하는 이중적 세태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회사가 성장 중인데도 ‘미래의 위기를 대비한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조직에서 능변 전략으로 태만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꼭 게으르지 않더라도 지금 하는 일에 대충 적당히 함,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대응한다. ‘일의 몰입은 멍청한 짓, 남 좋은 짓’이라는 의식에서다. 어차피 같은 보수 받을 바에야 꾀부릴수록 본인들에겐 이익이라는 계산이다. 헌신하다 헌신짝 돼 봉변당하는 부모세대를 익히 보았다는 나름의 임상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 좋으라고 열심히 일하나’의 비아냥이다. 한 푼이라도, 땀 한 방울이라도 나를 위해 쓰고 챙기겠다는 야무진 각오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착취(搾取)에는 사취(詐取)’로 맞대응하겠다는 이야기다. 착취는 계급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대가를 적게 지불하고 취득함을 뜻한다. 사취는 남의 것을 거짓으로 속여서 빼앗음이다. 과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착취에 사취로의 대응 전략은 봉변을 막는 능변 전략인가. 문득 ‘한비자(韓非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위나라의 어떤 사람이 그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말했다. “시집가거든 반드시 개인적으로 재물을 모아라. 남의 부인이 되고 보면 쫓겨나는 게 보통이고, 잘사는 것은 요행이란다.” 딸은 그 말을 듣고 딴 주머니를 차 재물을 모았다. 이 사실을 안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취한다고 내쫓았다.

그 딸이 친정으로 올 때는 시집갈 때보다 두 배의 재물을 가지고 왔다. 위나라 아비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은 자책하지 않고 부자가 된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는가? 위나라 사람의 딸은 과연 능변한 것인가, 봉변한 것인가?

직장에서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니 최대한 편하고 태만하게 지내려는 것은 바로 이 위나라 사람의 딸과 같지 않은가? 조직에서 얻는 것은 보수뿐 아니라 역량과 자기 파악이다. 경력을 쌓으며 계속해서 좋든 싫든 공식적, 비공식적 평가와 피드백을 받게 된다. 이 단계에서 얻는 평가와 지식은 나의 정체성과 실력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게 해준다. 자신을 아는 것은 조직 밖에서도 자기 일을 행하고 책임을 다하며 유용하고 보상을 받는 삶을 살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나저러나 치킨집 사장 하긴 마찬가지라고? 난 다르다고 생각한다. 같은 치킨집 사장을 하더라도 ‘잘되는 치킨집’과 ‘안 되는 치킨집’으로 갈릴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어느 회사, 어느 파트에 있든 그 일은 당신이 꿈꾸는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직장의 좋은 습관이 미래 직업의 좋은 습관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열심히 해야지’는 어불성설이다. 점이 연결돼 선이 되고, 선이 연결돼 면이 된다. 봉변과 능변의 차이는 뜻하지 않은 변화가 아니라 평소의 태도와 습관에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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