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나, 남자 자빠뜨린 여자야!

입력 2017-07-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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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기 센 여기자 둘을 소개합니다. 이쪽은 4년 후배를 엎어뜨려 결혼한 ○○○ 씨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1996년, 당시 근무하던 신문사 워크숍에서 동기를 자빠뜨린 ○○○ 씨입니다.”

주필(主筆)이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 신문사 자매지인 월간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장과 나를 소개하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언론계, 외교계, 학계, 공직자 등 우리나라 대표 지성인들이 모여 문화의 향기를 공유하는 ‘마르코글방’의 친목 모임 자리이다. 존경하는 분들 앞이라 몹시 떨리던 마음이 주필의 유머(사실을 근거로 한!) 한마디에 이내 가라앉았다.

유머는 여럿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반전시키고, 깐깐한 성격의 사람도 무장해제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특히 주필의 유머는 언제나 늘 항상 정갈하면서도 재치 있는 언어로 빛을 발한다.

“자빠뜨린 것과 엎어뜨린 건 어떻게 다른겨?”

“자빠뜨린 건 뒤로 넘어뜨린 거고, 엎어뜨린 건 앞으로 넘어뜨린 거여.”

또 한번 웃음이 터지고 나니 대화가 훨씬 더 편안하게 이어진다.

주필은 ‘못 말리는 교정 본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빠뜨리다와 엎어뜨리다의 뜻을 방향까지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나와 그녀가 왜 그들을 자빠뜨리고 엎어뜨렸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이 ‘19금’이 되는 건 원치 않아서이다.

자빠지다, 엎어지다와 비슷한 말로 ‘넘어지다’가 있다. 이 말은 방향이 어디가 되든 상관없이 쓸 수 있다. 즉 앞으로 엎어져도 넘어진 것이고, 뒤로 자빠지거나 옆으로 자빠져도 넘어진 것이다. 자빠지다와 엎어지다를 싸잡아 쓰는 말인 셈이다.

“재수 없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며 투덜거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다. 재수 있는 놈도 엎어지면 코가 깨질 수 있다고. 앞으로 넘어지는데 코가 깨지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면 눈치 빠른 이들은 속담 “재수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를 잘못 끌어다 쓴 걸 알고는 오히려 낄낄 웃곤 한다.

“자빠지면 코 닿을 데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뒤로 넘어져 보시라. 땅바닥에 뒤통수가 닿지 절대 코가 닿지 않는다. 뒤통수에 코 달린 사람이 없을 테니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바른 표현이다.

간혹 자빠뜨리다/자빠트리다, 엎어뜨리다/엎어트리다, 어느 것이 바른말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바른말이다. 한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 몇 가지가 널리 쓰이며 표준어 규정에 맞으면, 그 모두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표준어 규정 제26항을 따른 것이다.

‘-뜨리다/-트리다’는 몇몇 동사의 ‘-아/어’ 연결형 또는 어간 뒤에 붙어 ‘강조’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깨뜨리다/깨트리다, 밀어뜨리다/밀어트리다, 떨어뜨리다/떨어트리다, 쓰러뜨리다/쓰러트리다, 쏟뜨리다/쏟트리다, 찢뜨리다/찢트리다 등은 고민하지 않고 써도 된다.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함순례의 ‘사랑방’ 중에서)

함 시인 특유의 정겹고도 적나라한 표현이 좋아 자빠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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