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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물사전] 157.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입력 2017-07-19 10:02
중종반정으로 궁궐서 쫓겨난 ‘7일의 왕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치마바위. 중종이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를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기슭을 바라본다는 소식을 들은 신씨가 종을 시켜 자신이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아 간절한 뜻을 전했다고 한다.

1487(성종 18)∼1557(명종 12).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비이다. 본관은 거창으로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 한충인(韓忠仁)의 딸이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할아버지는 신승선(愼承善)이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와 아버지 신수근이 남매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 되고, 폐비 신씨는 단경왕후의 고모가 된다. 중종반정과 함께 폐위되어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 후에 영조 때 단경왕후로 추증되었다.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발생하였을 때 아버지 신수근이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이 끝난 후 중종은 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박원종 등 반정 주모자들이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

폐비 신씨는 처음에는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다. 당시 나이 20세로 생전에 복위 입궐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70평생을 청상(靑孀)으로 지내면서 이른바 애타는 ‘치마바위’의 슬픈 이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신씨가 폐위된 후 중전이 되었던 숙의 윤씨, 곧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원자(후의 인종)를 낳은 후 사망하자 폐비 신씨의 복위가 주청되었다. 김정(金淨)·박상(朴祥)과 같은 사림들은 신씨의 폐비에 명분이 없었으며, 장경왕후의 승하로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기에 복위는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복위는 이루어지지 않고 계비로 문정왕후가 간택되었다.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 12)에 사망하였다. 명종은 왕후 부모의 예에 따라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1698년(숙종 24) 폐비 신씨의 복위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선대 국왕과 직접 관계되는 사안이라 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후 폐비 복위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1739년(영조 15) 복위가 결정되어 종묘에 신주가 배향되었다. 이때 아버지 신수근의 관작(官爵)도 회복되었다. 복위가 결정된 후 시호를 단경(端敬)이라 하였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능호는 온릉(溫陵)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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