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개판’에 개(犬) 없다

입력 2017-07-0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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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 차장

“개할텨?”

짓궂은 대학 친구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달력을 살피니 다음 주 수요일(12일)이 초복이다. “개할텨?”는 충청도 사투리로 “개장국(보신탕) 먹을래?”라는 뜻이다. 애호가인 이 친구는 아마도 벌써 몇 그릇을 뚝딱 비웠을 것이다. “예민한 성격의 여자들한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절교 선언을 들을 수도 있으니 조심할 것!”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여자뿐이겠는가. 보신탕의 ‘보’ 자도 모르는 20~30대 젊은 층, 동물애호가 등에겐 야만인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견공(犬公)에게 ‘수난의 계절’이 돌아왔다. 여름 휴가철이면 길에 버려지는 반려동물 수가 전국적으로 수만 마리에 이른다. “휴가지에서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개만 남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버려진 개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다 차에 치여 죽고, 개장수에게 잡혀 식탁에 오르기도 하며, 유기견 보호소로 이송돼 안락사를 당하기도 한다. 겨우 살아남은 개들은 산으로 들어가 ‘들개’가 되기도 한다.

“오랜만에 불암산을 오르는데 개 네댓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산이 완전 개판이에요, 개판.” 불암산 기슭 백사마을 사람들이 재개발로 동네를 떠난 후, 기자가 등산할 때면 종종 듣는 말이다.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다 결국 산으로 들어갔을 개들을 생각하니 언짢다.

‘개판’ 하면 개들이 고깃덩어리를 차지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무질서하고 난잡한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개판은 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5분 전’을 붙이면 더욱더 명확해진다.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몇 가지 설(說)이 있다.

먼저 슬픈 역사인 6·25전쟁과 맞닿아 있다. 난리통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모여든 부산의 피란촌. 이곳에선 무료 배식을 하기 전 “개판 5분 전, 개판 5분 전”이라고 외쳐 배식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개판은 ‘밥솥 뚜껑을 연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전기 압력밥솥, 인공지능 밥솥 등 모양도 기능도 어마어마하지만 60여 년 전엔 솥단지 위에 나무판을 얹어 밥을 해 먹었기에 ‘열 개(開)’, ‘널판지 판(板)’ 자를 썼으리라. 집도 절도 없는 굶주린 피란민들이 밥을 먹기 위해 어지럽게 몰려드는 ‘개판’ 5분 전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개판이 솥뚜껑을 닫는다는 뜻 ‘蓋(덮을 개)板’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느닷없이 들었다. 밥이 얼마 남지 않은 배식 마감 5분 전의 상황을 그려 보시라.

씨름 용어인 ‘개판(改-)’에서 나왔다는 설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개판’은 씨름에서 승부가 나지 않거나 승부가 분명하지 않을 때 다시 하게 되는 판을 뜻한다. ‘재경기’와 같은 의미이다. 죽을힘을 다해 경기를 치렀는데, 판정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쩌겠는가? 선수뿐만 아니라 응원객끼리도 서로 자기 편이 이겼다며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모래판이 난장판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재경기 5분 전’인 ‘개판 5분 전’ 하면 ‘무질서하고 난잡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5분 전’을 뺀 ‘개판’도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됐다.

개꿈, 개나발, 개수작, 개죽음, 개망나니, 개잡놈…. 부정적인 의미의 이 단어들 속 ‘개-’ 역시 멍멍이, 도그(dog)와 거리가 멀다. 개들이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면 “억울하다”고 마구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 반려동물인 개들이 인간과 공존하며 행복했으면 한다. 부디 복날에도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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