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설렁탕과 오라질년

입력 2017-06-0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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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들마다 “덥다 덥다” 아우성이다. 여름을 대표하는 절기 하지(夏至)가 열흘 넘게 남았지만 때이른 더위에 보양식을 먹기도 한다.

“오늘 점심으로 거대한 ‘회오리(생으로 먹는 오리)’를 먹는 거 어때?”라고 아재 개그를 날리는 선배들도 있다. 보양식이 뭐 별건가. 뜨끈한 설렁탕 국물에 송송 썬 파를 듬뿍 넣고 밥을 말아 크게 한 숟가락 뜬 후 배추 겉절이를 척 얹어 먹으면 기운이 절로 솟아나지 않던가. 마음 편히 먹는, 제대로 된 한 끼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보시(布施)이다.

설렁탕을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가난에 찌든 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인력거꾼 김 첨지의 아내이다. 밑바닥 인생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남편에게 뺨을 맞고 다리를 차이고…눈물 나게 먹고 싶었던(젖먹이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싶어서였으리라!) 설렁탕 국물도 결국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죽은 그녀가 뭉클하게 떠오른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대표작 ‘운수 좋은 날’은 김 첨지 부부의 삶을 차갑고 잔혹하게 그린다. 그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서민의 대표 음식 설렁탕과 선술집의 막걸리, 그리고 험한 욕설들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 빙허(憑虛) 현진건의 절묘한 반어(反語) 기법에 어설픈 감상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이 난장맞을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 이 오라질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 이년아, 말을 해, 말을! (…)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느냐, 응. (…)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 첨지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욕설로 토해낸다. 난장맞을 년, 오라질년…. 그런데 이 같은 욕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가 많겠다. 김 첨지가 내뱉은 욕설은 형벌과 관련이 깊다.

우선 ‘난장맞을 년’의 난장(亂杖)은 몽둥이로 온몸을 닥치는 대로 마구 패는 형벌이다. ‘넨장맞을’, ‘젠장맞을’도 난장을 맞을 것이라는 의미로, 뜻에 맞지 않아 불평스러울 때 혼자 하는 욕이다. ‘오라질년’은 오랏줄로 묶일 년을 뜻한다. 오라는 도둑 등 죄인을 묶던 굵고 붉은 색의 줄이다. 어질고 덕이 뛰어났던 세종대왕도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겐 자주 했다는(사료 등 근거 자료는 없지만) ‘우라질’이 바로 오라질에서 나온 욕이다.

언짢을 때 내뱉는 제기랄, 육시랄 등의 욕 역시 무시무시한 형벌에서 나왔다. 찢어 죽인다는 제기랄, 시신을 다시 찢어 죽인다는 육시랄! 너무나도 잔인하지 않은가. 제기랄을 ‘제길할’로, 육시랄을 ‘육실할’로 말하고 적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경칠년’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욕이다. ‘경(?)’은 죄인의 이마나 팔뚝 따위에 먹줄로 죄명을 써 넣던 형벌이다.

날씨도 더운데 욕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뜨거운 설렁탕 국물과 깍두기 몇 점 안주 삼아 소주 한잔에 툴툴 털어내시라. 남에게 한 욕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니까. 더위를 물리치는 데도 이열치열(以熱治熱)이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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