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12. 동래군부인 정씨(東萊郡夫人 鄭氏)

입력 2017-05-1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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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아들의 출세 위해 헌신한 현모양처

동래군부인 정씨(東萊郡夫人 鄭氏·1104~1170)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이다. 본관은 동래(현 부산시 동래구)이며, 할아버지는 동래의 향리 자제로 개경에 단신 유학하여 입신(立身)한 정목(鄭穆)이다. 아버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지제고(禮部尙書 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知制誥)를 지낸 정항(鄭沆)이고, 어머니는 재상을 역임한 왕국모(王國髦)의 딸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다. 유명한 고려가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가 그녀의 형제이다.

부인은 타고난 자질이 얌전하고 착했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혼인할 나이가 되어 창원군(현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인 최유청(崔惟淸)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홀아비인 남편에게는 이미 아들(최간·崔諫)이 하나 있었으며, 부인 자신도 7남 1녀를 낳았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잘 꾸려 제사는 공경으로 받들고, 친척과 화목하며, 자식은 자애로이 기르고, 일하는 사람들은 은혜로이 부렸다.

최유청이 1만 권의 서적을 모아 놓고 검토와 열람에 전념하며 집안 살림에 정신을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부인이 집안일을 잘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관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에는 여러 아들들이 어리고 한창 자랄 때였다. 늘 집안에 손님이 가득하고 벼슬아치들이 자리를 메웠으나 부인은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대접하였다. 이에 그 집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은 누구나 먼저 부인의 훌륭함을 칭찬하였다.

최유청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장하기도 하고,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172년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롤 끝으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또 여러 아들들도 모두 학문에 힘써 입신양명(立身揚名)하였다. 8명의 아들[간, 후(詡), 인(諲), 당(讜), 종강(宗綱), 선(詵), 양(讓), 회옥(懷玉)]중 셋째만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고, 나머지는 훌륭히 장성하였다. 종강과 회옥은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나머지 5명은 관리가 되었다. 관리가 된 아들 중 4명이 급제를 하였으므로 그녀는 국가로부터 녹(祿)을 지급받았다. 세 아들이 급제하면 어머니에게 매년 쌀 30석을 주는 것이 국가의 법이었는데, 부인은 네 아들이 급제했으니 김부식(金富軾) 어머니의 예에 따라 쌀 40석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아들 넷, 승과까지 합치면 무려 6명을 과거에 급제시켰다는 것은 그녀의 자식 교육에 대한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동래군부인은 고려의 문화와 국력이 크게 성하였던 시절,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부덕을 갖춰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며, 그 결과 남편과 자식들이 크게 성공하였다. 그녀는 1170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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