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11. 평량군부인 이씨(平凉郡夫人 李氏)

입력 2017-05-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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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따라 청빈의 삶 산 고려 귀족부인

평량군부인 이씨(平凉郡夫人 李氏·1099~1157)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으로, 묘지명을 통하여 그녀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부인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삼한공신(三韓功臣) 태광(太匡) 궁열(弓烈)의 외손으로, 아버지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이선(李琁)이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어려서부터 여자의 일을 잘하였다. 자라서는 불경을 외우며 불교를 열심히 믿었다. 성품이 유순하고 부끄러움이 많아 큰 일이 아니면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므로, 비록 형제자매라도 그녀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부인은 16세에 이보여(李輔予)와 혼인하였다. 이보여는 인종의 측근에서 왕명(王命)을 출납하였는데, 청렴결백하고 엄중한 관리로 이름이 났다. 부인은 청렴한 남편과 마음을 같이하여 내조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지만, 오히려 의(義)로써 가난함을 즐겁게 여겼다. 낮에는 길쌈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며 근면하게 살림을 이끌어나갔다. 이보여는 종2품직인 병부상서(兵部尙書)·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까지 승진했으니, 상당한 고위 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집안 살림의 규모가 요새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가족 및 노비라는 기본 인원 외에 수시로 드나드는 일가친척, 남편의 친구와 동료, 제자, 식객 등 집이 늘 손님으로 넘쳐나 기본 녹봉만으로는 살림을 꾸리는 것이 쉽지 않았던 듯하다.

공민왕 때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조차 “신은 지금 병석에 누워 국사를 맡았는데/쌀 구걸로 해마다 생활 계책 졸렬하여/묽은 죽에 얼굴이 환히 비치는 지경이라/배고파 우는 노복(奴僕)들을 차마 보기 어렵네”라는 등의 가난과 관련한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반면 평량군부인과 동 시대를 살았던 권세가 이자겸(李資謙)의 집에는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며 사방에서 음식 선물이 들어와 항상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 났다”고 하여 대조를 보이고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녀는 ‘위로는 남편을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아이들과 노비 등 무려 수십 명을 거느리면서도 거두어 먹이고 기르는 데 부족함이 없는 듯이 하였으니, 참으로 어머니와 여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한다. 선물이 들어오면, 비록 친척이나 옛 친구가 보낸 것이라 할지라도 남편이 오기를 기다려 그 가부(可否)를 물은 뒤에야 물리거나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지위는 더욱 높아졌지만 살림은 더욱 가난해졌고, 이름은 더욱 빛났으나 절개는 더욱 견고해졌다.’

부인은 1157년에 59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은 네 명으로 당재(唐宰), 당주(唐柱), 당준(唐俊), 당필(唐泌)이 모두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

평량군부인은 고려시대 청빈한 삶을 영위하려 애쓰던 관료의 삶, 그리고 그 아내의 내조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불교를 독실히 믿고, 가정 경영의 주체이던 여성의 모습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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