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74.의인왕후(懿仁王后)

입력 2017-03-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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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못 낳아 선조에 홀대…홀로 피란 떠나기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 능.

1555(명종 10)∼1600년(선조 33). 조선 제14대 선조의 왕비이다. 성은 박씨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번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수갑(李壽甲)의 딸이다. 박응순은 인성왕후와 10촌 관계이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15세가 되던 1569년(선조 2) 12월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했다. 몸이 허약해서 오랫동안 앓는 바람에 결국 아이를 낳지 못했다. 자신이 국왕의 서손(庶孫)으로 즉위한 선조는 의인왕후가 대군을 낳아 적자로서 대통을 잇기를 희망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의인왕후를 통해 양반가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가례를 올리기 전 소주방의 나인이었던 김씨와 접촉하여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을 낳았다. 나인 김씨는 나중에 광해군에 의해 왕후로 추숭된 공빈 김씨이다.

선조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받길 원하여 각축전을 벌였다. 이러한 와중에 의인왕후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연유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왕후의 성품은 매우 후덕하여 후궁이 낳은 아이들을 잘 보살펴서 ‘살아 있는 관음보살’이라 불리기도 했다.

선조는 의인왕후를 매우 홀대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의인왕후는 뒤로하고 총애하던 인빈(仁嬪) 김씨와 피란길을 떠났다. 선조가 개성에 다다르자 백성들은 임금님이 백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후궁을 귀하게 여기느냐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선조가 인빈과 피란길을 떠나는 바람에 의인왕후는 하는 수 없이 홀로 피란길에 올랐다. 의인왕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1600년(선조 33) 6월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이다. 능호는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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