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72. 궁인 무비

입력 2017-03-1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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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인 출신 후궁…내명부 관직 끝내 못 얻어

궁인 무비(無比, 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의 후궁이다. 처음에 남경(현재의 서울시)의 관비였다가 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다.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려 3남 9녀를 낳았다. 의종에게는 장경왕후와 장선왕후가 있었다. 장경왕후는 종친 강릉공 왕온의 딸로서 1남 4녀를 낳았고, 장선왕후는 관리 최단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다. 두 왕후가 언제 죽었는지, 혹은 의종이 폐위될 때까지 살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무비는 이들에 못지않은 위세와 조정 내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환관 백선연이었다. 백선연은 남경의 관노 출신으로 의종이 남경에 갔을 때 보고 데려와 ‘양자(養子)’라 부르며 총애했다. 같은 남경 출신에 신분도 같았으니 드넓은 궁에서 둘 간의 애착과 연대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이 때문에 둘이 간통을 한다는 소문도 났다. 관리 문극겸은 이들이 추잡한 행동을 하고 술사(術士) 영의와 미신으로 왕을 유혹해 재물을 낭비한다며 백선연과 무비를 죽이라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의종실록을 적은 고려시대의 사관(史官)은 의종 패망의 원인을 불교와 귀신 숭배, 아첨하는 신하와 간사한 내시 및 술사, 그리고 무비를 지목하고 있다. 즉 무비가 안에서 일을 주관하며 왕의 비위를 맞춰 감언이설이 조정에 충만하고 충직한 말을 들을 수 없어 변란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물론 무신란이 이들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의종이 쿠데타로 쫓겨났으니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역으로나마 무비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12명의 왕자와 왕녀를 낳은 그녀였지만 신분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사위 최광균이 분에 넘치는 관직에 임명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분개하고, 해당 관리들은 임명장의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반발이 거셌던 것은 고려가 신분제 사회였고, 친족의 범주도 부계만이 아니라 모계나 처계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최광균의 처가 아무리 왕의 딸이라 해도 어미가 천하니 그녀도 천해, 그 남편 역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무비의 아들들도 왕자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들은 ‘소군(小君)’이라 하여 강제로 중이 되어야 했다. 무비 역시 ‘궁주’나 ‘원주’, ‘비(妃)’ 등 다른 후궁들이 갖는 내명부 관직을 갖지 못했다.

무신란이 일어나자 무비는 개경 근처에 있는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이를 정중부가 알고 잡아 죽이려 하였는데 공예태후가 간청해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 거제로 갔다. 이후 3년 뒤 의종은 시해되었는데, 무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무비는 천인 출신으로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았으나 그 자신 내명부에 임명되지도 못했고 자식들도 왕자와 왕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그녀는 고려시대 천인 출신 후궁의 위상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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