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69. 문경태후 이씨

입력 2017-03-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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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낳고 왕의 총애까지…고려 문벌귀족의 근원

문경태후 이씨(文敬太后 李氏, ?~1118)는 고려 16대 왕 예종의 제2비이다. 본관은 인주(현재의 인천광역시)이며, 아버지는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 어머니는 해주 최씨로 시중을 지낸 최사추의 딸이다. 예종의 부왕인 숙종은 인주 이씨에게 세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정주 유씨 출신인 명의태후 1명만 왕비로 두었다. 그러나 예종은 다시 인주 이씨와 혼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예종의 혼인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자.

예종의 제1비는 경화왕후(敬和王后)로 선종과 정신현비의 딸이다. 정신현비는 인주 이씨 이예의 딸이니 예종은 첫 번째 왕비부터 인주 이씨 집안의 여성을 들인 셈이다. 왜 경화왕후를 택했는가? 고려 전기 왕들의 경우 왕비 중 최소한 1명은 공주들 중에서 맞이했는데, 아버지 숙종의 형제로 순종과 선종이 있다.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선종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경화왕후가 장녀이고, 둘째딸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따라서 혼인할 수 있는 대상이 경화왕후뿐이었다.

그러면 두 번째 왕비로는 왜 또 인주 이씨인 문경태후를 택했는가? 여기에는 문경태후의 외가가 해주 최씨라는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해주 최씨는 해동공자 최충(崔沖) 이후 그 아들과 손자들이 연이어 재상과 문하시중을 지내며 당대 최고의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즉 해주 최씨의 현실적 위상이 그녀를 왕비가 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태후는 처음 궁에 들어와 연덕궁주(延德宮主)라 불렸으며, 1109년 예종의 맏아들인 왕해(인종)를 낳았다. 왕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은그릇과 비단, 말 등을 주며 기쁨을 표하였다. 1114년에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책봉문에는 그녀가 궁에 들어온 뒤 부부 화합의 모범을 보이고, 사사로운 청을 한 적이 없었으며,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고. 또 닭이 울면 기상을 권고하여 왕을 돌보았다는 등 그녀의 덕이 칭송되어 있다.

태후는 인종 외에 승덕(承德)·흥경(興慶) 두 궁주(宮主)를 낳고, 1118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시 그녀의 나이는 40세 이하로 추정된다. 인종이 1079년 생이므로 동갑이라 가정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보면, 태후는 성질이 유순하고 선량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병석에 눕자 왕이 친히 약을 조제하였으며, 죽으니 여러 차례 통곡하여 신하들로부터 예가 지나치다는 간언을 듣기도 하였다. 시호를 순덕왕후(順德王后)라고 하고, 수릉(綏陵)에 안장하였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하였으며, 1140년에 자정(慈靖)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문경태후는 최고 귀족가문의 딸로서 왕비가 되어 원자를 낳고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왕의 총애는 이후 이자겸 세도의 근원이 되었다. 여성으로서 그녀는 당시대가 요구하던 부덕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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