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65. 혜명왕후

입력 2017-03-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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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권력 모두 지키려 한 신라 효성왕의 妃

▲‘삼국유사’ 왕력편의 효성왕 기사.

혜명왕후(惠明王后)는 신라 제36대 효성왕(재위 737∼742년)의 왕비이다. 혜명왕후는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이다. 김순원 세력은 성덕왕 대에 이어 효성왕 대에도 유력 귀족가문이었다. 김순원은 성덕왕 19년(720)에 그의 딸인 소덕(炤德)을 성덕왕의 후비로 들여보냈다. 효성왕은 김순원의 외손자이다.

김순원은 그의 딸 혜명을 효성왕 3년(739)에 왕비로 들여보냈다. 김순원가는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대에도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효성왕에게는 혜명왕후 외에도 박씨 왕비와, 영종(永宗)의 딸인 후궁도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歷篇)에는 효성왕의 왕비로 혜명왕후만 기록되어 있다. 혜명왕후가 효성왕의 정비(正妃)였음을 알 수 있다. 혜명왕후와 김순원 세력의 부상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혜명왕후는 740년 3월에 당(唐)으로부터 왕비 책봉을 받았는데, 이를 통해 신라 왕비의 지위를 당으로부터 공인받았다. 이어서 740년 8월에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진찬 영종은 효성왕의 후궁의 아버지였다. 일찍이 효성왕은 후궁을 매우 사랑하여 그를 향한 은총이 점점 더해갔다. 이에 왕비가 질투하여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후궁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영종이 왕비와 그의 친족들을 원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반역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왕비와 후궁 간 갈등의 원인은 효성왕의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정치세력 간의 분쟁이었다. 왕비 세력이 이겼고, 이에 영종은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압되어 죽었다. 승자인 왕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지위와 그에 따른 정치적 위상은 공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혜명왕후와 김순원 세력은 왕후의 지위와 위상을 독점적으로 향유하기 위하여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후궁 세력과의 정쟁에서 이기고자 하였다. 효성왕이 후궁을 사랑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기에 은총이 점점 더해갔던 것이 문제였다. 이것이 혜명왕후와 그의 일족들에게 위기감을 주었던 것이다.

효성왕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효성왕의 동생인 경덕왕이 즉위하였고, 혜명왕후는 태후가 되었다. 혜명왕후는 신라 왕실에서 ‘왕후’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지켜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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