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의 과학에세이] 영화 속의 따분한 수학자

입력 2017-02-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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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 아주대 석좌교수

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의 주인공은 43세의 영국 방송국 토크쇼 연출자. 강남스타일 음악에 맞춰 멋지게 춤을 추는 쾌활한 미혼 여성이다. 10년간 사랑하던 변호사 마크와의 관계에서 좌절을 느끼던 차에 우연히 만난 미국인 잭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다음 주에는 마크를 만나게 됐는데, 가족 문제로 힘들어하는 그를 위로하다가 그만… 임신한 걸 알게 되지만 아이 아빠가 마크인지 잭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잭은 수학자 출신으로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수학 알고리즘으로 중매 사이트를 만들어서 인기를 끌었다. 브리짓이 연출하는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 잭이 무대 위에서 겪는 상황은 수학자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브리짓의 보스는 공격적인 성향의 여성인데, 잭이 누구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는지 등의 가십거리에만 관심이 있다. 수학은 따분해서 방송 콘텐츠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잭이 자기 알고리즘 얘기를 하려 하면 진행자에게 대화를 딴 데로 돌리라고 지시한다.

영화는 스테레오 타이프에 충실하다. ‘따분한 수학자’와 ‘수학을 따분하게 여기는 방송인’. 수학자가 사랑하는 여성을 뺏기는 결론까지. 그러니까 수학이 재미없다는 고정 관념은 어디나 똑같다. 학창시절 수학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 그 생각을 안 바꾸리라 결심한 사람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방송인에 대한 이런 고정 이미지는 공정하지 않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물리학자를 연기한 앤 해서웨이는 실제로 과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이 높다고 한다. 파티장에서 만난 물리학자에게 초끈 이론을 묻고 쿼크에 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대니카 맥켈러는 TV 시리즈 ‘케빈은 열두 살’ 등에 출현했던 아역 배우 출신의 영화배우다. 수학 대중서를 4권 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대학 재학 중에는 퍼콜레이션에 대한 난해한 제목의 연구논문을 저널에 싣기도 했다. 미국 UCLA 대학 수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미국 소녀들을 수학의 매력에 빠지게 하겠다는 결의로 뭉친 듯하다.

한때 사이먼과 가펑클로 인기 있었던 가수 아트 가펑클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뒤에 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수학자와 가수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가수의 길을 택했지만, 가수로서의 정점에 있던 시절 수학 교육학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이쯤 되면 열혈 학구열이라고 할 만하다.

2001년 영화 ‘뷰티플 마인드’는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천재 존 내시를 그리면서 수학자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사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인식에 한몫했다. 최근 상영된 영화 ‘무한을 본 남자’도 스스로의 천재성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천재 라마누잔을 그린다. 반면에 ‘N은 수(數)다: 폴 에르되시의 초상’은 수학자에 대한 아주 다른 시각을 드러낸 다큐멘터리다. 무소유의 자유로운 삶을 살며 세상을 떠돌던 수학자 폴 에르되시(1913~1996)의 얘기다. 평생 정처 없이 여행하며 수많은 수학자와의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사람을 그리며, 영감의 교환을 통해 수학적 발견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깊은 사념에 빠지다가 소통을 통해 돌파구를 찾는 것. 어느 분야든 난제 해결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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