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52. 명의왕태후

입력 2017-02-1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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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비에서 태후까지 고려 전기 ‘평탄한 삶’

명의왕태후 류씨(明懿王太后 柳氏: ?~1112)는 고려 제15대 숙종의 왕비이다. 본관은 정주(貞州·황해북도 개풍군)이며, 아버지는 유홍(柳洪),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황(金元晃)의 딸이다.

1077년 무렵에 문종의 셋째 왕자인 왕옹(숙종)과 혼인하여 명복궁주(明福宮主)라고 불렸다. 1083년 문종이 사망하고, 문종의 장자인 순종이 즉위하였다. 다시 3개월 뒤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 선종이 즉위하였다. 1094년 선종이 별세하니 선종의 아들(헌종)이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고, 그 모후인 사숙태후가 섭정하였다.

1095년 남편 왕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헌종을 폐하고 즉위하였다. 그녀는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승격되었으며, 109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책봉문에 의하면 그녀가 부녀의 도리를 잘 지키고, 임금의 사업을 내조하여 신명(神明)의 도움으로 자손이 번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그녀는 1079년 장남 왕우(예종)를 필두로 상당후 왕필, 대녕궁주 등 7남 4녀를 출산하였다.

1105년 남편이 죽고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라 그녀에게 왕태후라 존호를 올리고 궁을 천화전(天和殿), 부를 숭명부(崇明府), 생일을 지원절(至元節)이라 하였다. 예종은 효도가 지극했다 하며, 고려사를 보면 간혹 태후를 ‘조견(朝見)’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朝)’는 신하가 국왕이나 황제를 뵐 때에 한정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원(元) 간섭기에 충렬왕 부처가 원의 황태후를 만날 때조차 ‘조견’이 아닌 ‘알현’이라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태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태후는 1112년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명의왕태후이다. 시호를 올리는 책문에 ‘남달리 앞일을 내다보고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온화하고 거룩한 선(善)을 의(懿)라고 한다’는 시호 제정의 이유와, “큰 기업을 이어 받음에 미쳐서는 매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라는 문구에서 태후의 정치적 영향력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숭릉(崇陵)에 장사 지냈으며, 1114년 태묘에 숙종과 함께 모셨다. 1140년 유가(柔嘉), 1253년 광혜(光惠)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명의왕태후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왕자비, 왕비가 되어 많은 자녀를 낳고 평탄한 부부생활을 영위하였다. 가장 좋은 것은 남편이 다른 후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종 이후 인주 이씨가 외척으로 권세를 부렸고, 급기야는 이자의가 여동생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를 왕위에 올리려 난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이를 분쇄하고 즉위한 숙종인 만큼 외척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남편 사후에는 아들이 즉위해 태후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명의왕태후는 고려 전기 왕실 여성 중 가장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녀의 아내 및 어머니로서의 덕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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