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51. 사숙태후

입력 2017-02-1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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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까지 했지만 쿠데타로 권력 잃고 쓸쓸한 삶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생몰년 미상)는 고려 선종의 제2비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석, 할아버지는 이자연이다. 선종에게는 왕비가 세 명 있었는데, 셋 다 이자연의 손녀이다. 또한 시어머니라 할 수 있는 문종의 왕비 세 명은 모두 이자연의 딸로서 사숙태후의 고모들이다. 즉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의 번성이 한창이던 시절 왕비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자식은 1남 2녀로 헌종과 일찍 죽은 딸, 그리고 수안택주(遂安宅主)가 있다.

태후는 선종이 왕자(국원공·國原公)였던 시절에 혼인하여 연화궁비(延和宮妃)라고 하였다. 1083년 선종이 즉위하니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제1비인 정신현비(貞信賢妃)는 딸 하나를 낳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태후는 1084년 선종의 맏아들 왕욱(헌종)을 낳았다.

1094년 선종이 병으로 죽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였다. 그녀는 태후가 되어 궁을 중화전(中和殿)이라 하고 부(府)를 설치하여 영녕부(永寧府)라고 하였다. 당시 왕이 11세였기에 태후가 집정하여 군사와 행정을 포함한 정사 일체를 모두 다 맡아 처결하였다. 태후의 섭정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임조칭제(臨朝稱制)’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태후가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고, 태후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에 해당하는 ‘제(制)’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조정에서 태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095년 7월 이자의(李資義)의 난이 일어났다. 이자의는 이자연의 손자로 사숙태후와는 사촌 간이다. 이자의의 누이인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元信宮主)가 한산후(漢山侯) 왕윤을 낳았는데, 이자의는 왕윤을 왕위에 올리려 반란을 도모했다. 이자의 일당은 왕의 숙부였던 계림공(숙종)에 의해 토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계림공의 쿠데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계림공은 난을 진압한 뒤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인 중서령에 올랐고, 그해 10월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후 태후는 아들 헌종과 함께 남편이 즉위 전 왕자 시절에 머물던 흥성궁으로 돌아가 거주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097년 헌종이 사망하였고, 태후의 영녕부 및 중화전의 칭호도 폐지되었다. 이후 그녀는 더욱 쓸쓸한 말년을 보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태후는 1107년 선종의 사당에 합사되었다. 제1비 정신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난 반면 사숙태후는 왕비로서 내조한 공이 많았고, 태자가 즉위한 뒤 섭정을 한 점, 그리고 숙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뒤 옛 궁에 퇴거해 끝까지 그 덕을 잃지 않은 점이 고려되었다. 1140년(인종 18) 정화(貞和), 1253년(고종 40) 광숙(匡肅)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사숙태후는 고려의 문벌귀족 정치가 성하던 시절 대표 문벌가문의 딸로서 섭정을 하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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