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국남의 직격탄] 흙수저女와 금수저男이 사랑을?

입력 2016-10-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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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평론가

“저 구름에 달빛에 내 마음 보일까/ 빛바랜 담장 아래 나 숨어봅니다/ …그리워 그리워서 더는 못 잊을 사람/ 눈물이 가슴이 그댈 부르고 있어/ 사랑해 사랑해서 더는 못 보낼 사람/그대 뒤에서 갈 곳을 잃어/ 나 울고만 있어 그대…” 애절한 드라마 OST ‘그리워 그리워서’가 흐른다. “보이지 않으니 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거든. 그러니 내 곁에 있어라.” 왕세자 이영(박보검 분)이 남장 내시 홍라온(김유정 분)에게 건네는 애달픈 대사가 이어진다.

손님이 왔는데도 넋을 놓고 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요즘 수많은 사람을 설레게 하며 시청률 20%를 넘어선 KBS 미니시리즈 ‘구르미 그린 달빛’이다.

하루 일을 마감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많은 사람의 눈이 왕세자와 역적 홍경래의 딸이 운명과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절절한 사랑으로 향한다. ‘구르미 그린 달빛’뿐만 아니다.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등 TV 화면을 점령하며 시청자의 눈을 빼앗는 드라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본과 권력을 쥔 금수저 남자와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로 대변되는 흙수저 여자의 지순한 사랑을 그린다.

손님의 인기척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는 순간 직면한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가 저서 ‘결혼’에서 소개한 한 결혼정보회사의 남성 회원 등급표는 재산과 학벌, 외모 등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으로 전락한 남녀의 사랑과 결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산 항목에선 (부모 재산 포함) 100억 원 이상이 1등급이고, 3억 원 이하는 10등급이다. 학벌 부문에선 서울대, 카이스트, 미국 명문대 등이 1등급, 2년제 대학은 10등급이다. 키와 몸무게는 185cm에 75kg이 1등급, 167cm에 57kg은 10등급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적했듯 자본의 돈 버는 속도가 노동의 돈 버는 속도를 앞지르며 자본을 바탕으로 한 서열화가 진행되고, 자본과 권력의 세습 시스템이 구축된 우리 현실에선 사람 아닌 자본이 사랑과 결혼의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사랑과 결혼은 재산과 학벌, 외모 등 외형적 조건의 교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힘든 상황과 운명, 자본의 차이를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린 박제된 신화일 뿐이다.

‘흙수저와 금수저’ ‘헬조선’ ‘88만 원 세대’ ‘취업난과 비정규직’…. 자본을 바탕으로 한 서열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미루는 3포,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내 집 마련에 대한 생각조차도 안 하는 5포, 희망과 꿈마저 포기하는 7포 등 포기의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그런데 TV 화면에는 금수저 남자와 흙수저 여자의 자본 서열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담은 드라마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3포 세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그 드라마들에 열광하고 정신없이 빠져든다. 잠시나마 자본 서열화가 초래한 현실의 고통과 늘어만 가는 포기 숫자의 절망, 재산과 학벌, 외모의 교환시장으로 전락한 결혼의 참담함을 잊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시급 6000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지만 ‘구르미 그린 달빛’을 보는 순간에는 진상 손님의 갑질도, 1년에 1200만 원을 내야 하는 등록금 걱정도, 그리고 취업에 대한 불안감도 잠시 잊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비록 휴대폰에서 눈을 떼는 순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현실은 냉혹하고 차갑기만 하지만.

편의점을 나서는 순간,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재빨리 다시 휴대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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