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기획 도전하는 여성 ⑮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로봇에 빠진 ‘소공녀’들이여…여기 모여 ‘과학’ 하세요”

입력 2016-09-22 10:59수정 2016-09-2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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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는 왜 ‘남자들만의 판’인가… 로봇하는 여성들 네트워크 조직 ‘걸스로봇’ 창업

<평행우주 속의 소녀(The Only Woman in the Room: Why Science Is Still a Boys' Club)>란 책을 아시는지. 미국 예일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했지만 물리학자가 되지 않은, 되지 못한 아일린 폴락(Eileen Pollack) 미시간대 영문과 교수가 쓴 자신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일린 폴락은 수학과 물리학에 흥미가 많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폴락의 싹(?)을 꺾는다. “여자애가 수학과 과학에서 월반하면 사회 생활을 망치게 된다”며 상급반 프로그램을 들을 수 없도록 했다.

대학 전공으로 물리학을 선택했지만 남자애들보다 부족한 실력 때문에 수학과 물리학에서 F학점까지 받자 폴락의 부모는 “전공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폴락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분발해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아 냈다. 그러나 끝내 물리학과의 이별을 택한다. 폴락은“만일 교수님 가운데 한 분이라도 내가 물리학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셨다면 대학원에 진학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시 말해 그런 격려는 없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지속 가능할 리도 없었다는 것이고. 폴락은 재능과 학점만으로 그 계(界)에서 버티는게 무리란 걸 잘 알았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세계)가 아닌 평행선 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 이른바 ‘평행우주’에서는 소녀들이 과학 공부를 맘껏 하고 연구도 맘껏 하며 행복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도 폴락은 여성들에게 과학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일깨우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글과 말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진주 걸스로봇(Girl‘s Robot) 대표는 ‘한국의 폴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걸스로봇은 ‘로봇 하는 여자들의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소셜 스타트업이다. 로봇 공학을 전공한 여성뿐 아니라‘소공녀(소수정예 공대 여대생: 걸스로봇이 지은 조어다)’, 더 넓게는 로봇과 로봇이 대변하는 과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여성을 아우르고자 하는 모임이다.

이진주 대표는 로봇 공학자가 아니다. 로봇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로봇을 좋아하는 여성이다. 휴보 같은 진짜 로봇의 덕후(매니아)이기도 하지만‘소공녀’들이 잘 살아남아 학문을 갈고 닦길 바라는 선배이자 후배 여성이기도 하다.

이 대표의 이력은 반전이다. 연예인 같은 외모와 달리 터프(?)하다. 로봇을 계기삼아 여성들을 모으고 그 장(場)에서 부지런히 중개역을 하고 있는 이 대표의 지금은‘사범대학을 나와 일간지 기자를 했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 불가하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갈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운전해 지금까지 왔다. 비록 돌고 휘었더래도. 강남의 ‘공주학교’를 다녔지만 집안 배경과 자본력에 휘둘리는 속물 질서에 신물이 났던 그는 획일적인 교육을 비판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어나더 브릭 인 더 월(Another Brick In The Wall)’같은 노래를 들으며 반골 기질을 키웠다.

내신 경쟁엔 휘말리지 않겠다는 주의였지만 머리 좋은 그의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우수했고 서울시 고등학생 과학영재로도 뽑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남산에 있는 서울과학관에 모여 과학 실험을 하고 수업을 들었으며 과학경시대회에 나가 금상도 탔다. 반짝반짝하던 그는 그러나 자신했던 수능에서 삐긋해버렸다. 알파걸 장녀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아버지는 속상해하면서도 딸이 안전하게 복수 지원해 붙은 수도권에 있는 한 공대에 진학하라고 조언했다.

큰 반발없이‘일단 가 본’공대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상황에 부딪치면서 그는 곧 깨달았다. ‘공대 아름이(공대에 여학생이 드물어 공주 대접을 받는 걸 비유한 조어)’로 즐겁게 살 수는 있어도‘남자들의 질서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판’에선 주류가 되긴 어렵다는 걸. 실제 졸업 후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동기는 거의 없다고. 다시 입시를 준비해 여자들이 많고 미래 직업도 안정적으로 가질 수 있으며 기계와 공학 대신 문학이 있는 사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안전하게 국어 선생님이 되는 걸로 마무리? 아니다. 이야기는 또 곁으로 샌다. 이 대표는 삼성전자에 입사해 재밌게 다녔지만 언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그만 두고 언론사 준비를 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있는 서른 살에 중앙일보 기자가 됐다.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공대 아름이’나 ‘국어 선생님’으로 살았어도 편안했잖겠느냐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기자 일은 딱 맞는 옷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고도지능아로 판명된 첫째 아들이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죽음’을 소재로 시를 쓴 것을 보고 뒷통수를 얻어맞았다. 학교폭력이 있었고 그것을 자행하는 아이들 뒤엔 그런 부모들이 있었다. 환경을 바꾸지 않고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걸 분명하게 깨달은 엄마 이진주 대표는 과감하게 강남과 서울을 빠져나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로 결심하고 제주로 향했다. 또다른 길, 또다른 삶에 도전한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제주 생활도 안정을 찾을 즈음 이 대표는 로봇을 사랑했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지난해 처음 생긴‘로봇공학을 위한 열린 모임(로열모)’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걸스로봇 창업이란 도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걸스로봇은 최초의 오프라인 모임을 열었다. 국내외 로봇 공학계 여성 대표인사들을 모았다.

이 모임에서도, 학계에서도 맏언니인 조혜경 한성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니 웃프다. 50줄에 들어서야 “이제 내 연구, 내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하니 말이다. 대학입시를 기준으로 딸 둘을 잘 키워냈다는 평가를 듣기까지 조혜경 교수는 본격적인 자신만의 연구는 포기했다. 조 교수는 그 시간을‘남자 한 사람 몫을 하기 위한 30년’이라고 부른단다. 한국에서 여성의 삶이란 어떤 건지 상기해보게 된다.

이동희 독일 뮌헨대 로봇공학과 교수는 자신의 일을 오롯이 인정해주고 가사와 육아 분담도 확실히 하겠다는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 로봇 공학자 한재권 교수의 부인이자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장르)를 하는 엄윤설씨는 여성이 과학을 포함해 일을 하기 위해선 “좋은 남편을 골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르지 못하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이 대표 역시 아들 둘을 키우고 고군분투하며 걸스로봇을 이끌어 가고 있다.“내가 사랑했던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행복한 아이로 만들었으니 이제 나의 일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여성들의 도약과 도전을 위해선 조건없는 지원을 해주고 싶다 한다. 이제 막 시작한 걸스로봇의 사업 방식은 다양하게 열어두고 있다. 여성 과학자들, 과학자를 꿈꾸는 소녀들, 이공계 여학생들, 로봇과 과학에 관심있는 모든 여성들을 아우르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수익모델을 갖춰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장기적 목표다.

그 일환으로 고급 콘텐츠 생산, 유통을 맡는 채널 퍼블리(Publy.co)와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예술가들을 학교 캠퍼스로 초대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엔드리스 로드’에 참여해서 만난 남녀 교수들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 프로젝트‘위민 인 KAIST(Women in KAIST)’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목표액을 초과 달성했다.

“대학 때 단짝친구가 자기 삶을 유보하면서 열심히 살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어요. 대충 타협하며 세상을 살 수 없다, 당장 세상을 떠난대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제일 하고 싶은게 뭔가 생각했더니 그건 평행우주에 있는 소녀를 이쪽 제가 살고 있는 우주로 불러와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었어요. 죽음을 곧 맞을 수도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저에겐 도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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