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공간] 대서(大暑)와 냉면이야기

입력 2016-07-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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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인

함흥냉면

함흥은 없고 냉면만 남았다

함경남도 바닷가

집은 멀고 고향 잃은 음식이다

그해 겨울 눈 내리는 흥남에서

LST 타고 떠나온 뒤

함흥냉면에는 함흥이 없고

메밀이 들어 있다

못 가는 북방의 냉기처럼 서늘한

더운 날엔 혀가 기쁘라고

굵은 고추무거리에

푸덕한 명태 버무려 회를 얹은

잇몸을 간질이는 면발을 끊어내며

혀에 척척 감아 날래 먹고 나면

왠지 섭섭한 음식

함흥은 못 가고 냉면만 먹는다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서

성하(盛夏)다. 길섶의 칡넝쿨은 하루에 한 발 이상 뻗어 오르고 배롱나무는 붉고 환하게 꽃을 피웠다. 며칠 지나면 대서(大暑)다. 대서는 소서와 입추 사이에 들고 옛말에 썩은 풀이 변하여 반딧불이가 되고 너무 더워 염소뿔이 녹는다고 했다. 가뭄 끝의 수박과 참외에 단맛이 든다. 더위에 지친 몸을 보하는 음식으로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많이 찾지만 더위를 쫓거나 잊는 음식으로는 여름 한 철 냉면만 한 게 없다. 시원한 육수에 거무스레하고 쫄깃한 면발을 잇몸으로 느끼는 그 슴슴한 맛이야말로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식이다.

평양냉면은 메밀로 만들지만 함흥냉면은 감자전분이 주원료라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농마국수라 부른다. 평양냉면은 메밀로 하기 때문에 툭툭 끊어지고 구수하고 담백하지만 함흥냉면은 면발이 쇠심줄보다 질겨야 제맛이라고 한다. 아무튼 냉면은 찬 음식이고 북한은 추운 곳인데 왜 함흥이나 평양에서 냉면이 겨울철 계절 음식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하긴 추운 겨울에 먹는 냉면맛 또한 별미이고 보면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멋과 맛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골목길이나 음식점 거리에서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 간판을 보면 반갑고 또 낯설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북한 지명이 평양과 함흥인 것은 오로지 질긴 냉면 면발의 힘이 아닐까?

지금은 금강산 관광도 막히고 개성공단도 문을 닫았다. 앞뒤가 꽉 막힌 한반도의 여름은 대서의 찜통더위만큼이나 갑갑하다. 거기다가 날이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는 군사적 대립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다. 하여튼 어떤 정치집단이 정권을 잡느냐 혹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민족문제나 통일문제가 널뛰듯 하는 것은 국민으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맹자는 천하는 천하 사람의 것이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여름, 경의선이나 동해북부선을 타고 함흥이나 평양에 가 진짜배기 냉면을 맛볼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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