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거목들] ⑬ 지덕영 전 증권업협회장

입력 2016-05-1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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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증권파동’ 구원투수로…법제도 정비 ‘큰그림’

황무지에서 싹을 틔운 국내 자본시장이 오늘날 큰 나무가 되기까지는 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은 어린 묘목이 아플 때 치료해주는 손길이다. 1962년 이른바 ‘증권파동’이후 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를 이끌었던 고 지덕영 전 증권업협회장의 이야기다. 지 전 회장은 국내 증권시장이 가장 암울했던 시절 업계를 이끌며 ‘암흑기’를 수습하고 향후 발전의 기틀을 닦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매청·재무부·상공부 거친 ‘엘리트 관료’ 출신 =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1913년생인 지 전 회장은 19세에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강점기 경성전매지국(전매청)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기준으로 ‘엘리트 경제관료’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에도 관직생활을 계속했다. 정부의 인사발령 자료에는 그가 전주지방전매국장, 재무부 전매국 경리과장, 상공부 상역국장 등을 거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관직에서 물러나고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보폭을 넓혀 활동했다. 명보극장 대표를 지낸 뒤 극장협회회장을 지내는 등 영화업계의 핵심인사로 활약했으며, 1954년에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마포갑 선거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정계진출을 노리기도 했다.

증권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직후였다. 41세였던 1954년 서울증권주식회사(현 유진투자증권)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나서 1967년 별세할 때까지 15년간 재직했다. 오늘날 시각으로는 전매청 출신의 경력과 증권업이 맞지 않은 듯 초기 증권이라는 것은 농작물 등의 전매와도 큰 관련이 있었다는 점에서 관련이 있는 분야로 진출한 셈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증권업계에 합류했지만 증권업에 대한 이해도는 깊었다고 전해진다.

지 전 회장의 증권업계 입문은 빠르지 않았지만 이후 곧바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지 전 회장은△제6대(1956년 10월~12월) △제9대(1960년 5월~1961년 4월) △제13대, 제14대(1962년 12월~1963년 7월) △제19대(1966년 4월~1967년 3월) 등 총 다섯 차례 증권업 협회장을 지냈다. 2개월에 불과했던 제6대 회장직을 제외하면 대부분 재임기간이 1960년대 초반에 몰려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는 국내 증시가 가장 엄혹했던 때였다.

◇ 증권업계 ‘암흑기’ 증권협회장 재임…구원투수 역할 = 지 전 회장의 대부분 재임기는 1962년 발생한 ‘증권파동’으로 국내 증시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다. 증권파동이란 투기성자금이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의 증권(대증주)에 몰리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돈이나 주식 없이 체결된 허수거래가 많았던 허술한 거래여건이 화근이었다. 증시가 활황을 띠면서 실제 발행된 주식수보다 많은 주식이 거래됐고, 급기야 증권사의 자금조달이 한계에 부딪혔다. 정부가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일반투자자들이 엄청난 재산손실을 막을 수 없었다.

증권파동의 후유증은 컸다. 활황세를 보이던 증권시장은 곧바로 장기침체에 빠졌다. 거래소가 개장과 휴장을 반복하는 사이 시장의 기능은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군사정부의 개입설마저 거론되면서 투자자들이 증권시장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됐다. 증권업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일은 증권업협회장의 가장 큰 당면과제였다.

지 전 회장은 시장이 침체해 있을수록 증권업협회의 역할이 크다고 인식했다. 그는 정부에 대한 법률건의 건수를 연간 7~8회에서 26~27회로 대폭 늘렸다. 이를 위해 증권업협회 내부에 연구조직을 대폭 강화하기도 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당시 정책건의를 보면 개별 회원사의 이익보다 증권업계 전체의 방향을 제시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시장에 대한 신뢰회복이 최우선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당시 협회의 건의사항 가운데는 정부가 실제 수용해 추진한 내용이 많았다. 훗날 자본시장 성장의 기폭제가 된 ‘기업공개촉진법’의 초기 아이디어도 협회의 건의사항에 포함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지 전 회장은 투자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등 당시로써 드물게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기관장으로 기억된다. 당시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부는 협회간행물인 ‘증권신보’를 폐간토록 했다. 이에 지 전 회장은 증권시세표를 만들어 배포하길 건의했다고 한다. 소통을 중시했던 성향은 영화업계에 깊이 몸담았던 그의 경력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울러 지 전 회장은 재임기간 국내에서 처음으로 증권전문인력 양성을 시작하기도 했다. 증권업계의 미래를 바라본 큰 그림에서였다. 1962년 훗날 ‘투자상담사’로 불리는 ‘외무원’ 제도를 도입한 것. 같은 해 12월부터는 재무부 등록이 의무화됐고 나중에는 자격시험제도 등이 단계적으로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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