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이뤄낸 경제거인들 이병철·정주영·최종현 회장
1962년 2월 22일.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5층에 자리 잡은 무역협회 회의실에는 178명의 기업인이 모여 수출 진흥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민경제의 최대 과제인 자립경제 기반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에 있다. 우리 무역업자는 수출 5개년계획의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각오와 열의로 우리의 총역량을 수출 진흥에 기울일 것을 결의한다.’
마카오와 홍콩무역, 미국과의 원조무역을 거친 무역인들이 경제개발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결의문 채택은 경제개발을 공업화와 수출로 정한 혁명정부의 의지도 반영됐다. 이후 50여년이 흐른 지금, 삼성과 현대차, LG 등 전 세계를 누비는 우리 기업들이 늘면서 생소했던 ‘코리아’는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이름이 됐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기업인들의 땀 덕분이다. 하지만 최근 기업인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며 사정 당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기업을 다독이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국가와 기업 모두 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가산업 재건 위해 제조업 뛰어든 호암 이병철=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 회장은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의존하면 언제까지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산업의 재건을 위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해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을 수입품의 3분의 1 가격에 공급하며 국민의 생활고를 덜어주는 데 일조했다.
이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했던 모직사업에도 진출했다. 당시 영국제 양복 한 벌 값은 웬만한 봉급생활자의 3개월분 급료와 맞먹는 6만환이 넘었지만 제일모직의 양복은 2000환에 불과했다. 초반에는 국산품에 대한 불신으로 잘 안 팔렸지만, 품질이 외국제와 맞먹는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큰 인기를 얻는다. 1957년 10월 26일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모직 대구 공장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의 첫번째 공장 시찰이다.
이 대통령은 시찰을 마친 후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애국적 사업이야. 이처럼 자랑스러운 공장을 세워 줘서 감사해. 제일모직의 노력으로 온 국민이 좋은 국산 양복을 입게 됐구먼”이라고 치하했다. 이 대통령은 또 모든 백성에게 옷을 입히라는 ‘의피창생(依被蒼生)’이란 휘호를 남겨주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며 1970년대 반도체 사업에도 진출했다. 당시 반도체사업은 막대한 투자와 첨단기술이 필요한 난공불락의 사업으로 여겼다. 더욱이 기술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사업을 시작해도 수익 창출이 불투명하다는 비관론이 거셌다. 당시 그는 밤잠을 설쳐가면서 힘겨운 결단을 내린다. 그의 나이 73세 때였다.
◇“해 보기나 했어?”거북선으로 조선 강국 만든 정주영 회장 =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해외건설과 중공업 건설에 뛰어들었고, 조선산업과 자동차산업을 일류로 이끌어냈다. 특히 조선소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1971년 런던으로 날아가 롱바톰 A&P애플도어 회장을 만났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 그림을 롱바톰 회장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 결국 당시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던 우리나라가 세계 조선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발점이 됐다.
정 회장은 1970년 준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에 혼신을 다했던 정주영 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의욕을 가장 앞장서서 실천에 옮긴 기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오일쇼크 때 석유 들여온 최종현 회장 = 고(故) 최종현 SK 회장은 1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이 석유위기에 직면했을 때 위기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이다. 당시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정에 따라 한국은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됐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최종현 회장을 사우디로 급파했다. 최 회장이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씩의 원유를 공급받을 정도로 사우디 왕실 측근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사우디에 급파된 최 회장은 왕실과 접촉하면서 야마니 석유장관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인의 삶을 추구했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간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지론으로 소비재산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 회장은 위험도가 매우 높은 화약사업을 시작으로 석유화학·기계산업 등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사업에 집중 투자해 우리나라 기간산업의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구인회 LG 창업주도 1950년대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의 호황에 안주하지 않고 전자산업 진출을 결정했다. 당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는 “지금 머뭇거리면 앞으로 영원히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힘들다. 지금이 개척자 정신을 보여줄 때”라며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