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모노즈쿠리’ 왕국] ① 흔들리는 가전왕국…TV가 족쇄

입력 2012-02-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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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일본이 위험하다. 지난해 3월 대지진 이후 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특히 제조업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일본’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워크맨 신화의 주역인 가전은 물론 자동차, 반도체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휘청거리고 있다.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하는 등 전반적인 경제 상황마저 기업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3회에 걸쳐 일본의 제조업을 긴급 진단한다)

<글 싣는 순서>

① 흔들리는 가전왕국…TV가 족쇄

② 기로에 선 자동차산업

③ 벼랑 위의 반도체산업

▲일본 소비자가 도쿄의 한 가전매장에 나란히 전시된 소니와 LG전자의 TV를 보고 있다. 소니 샤프 파나소닉 등 일본 3대 가전업체는 2011 회계연도에 170억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낼 전망이다. 블룸버그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상품 전시회인 국제가전쇼(CES)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기업이 올해 출시할 55인치형 OLED TV가 전시됐다. 정작 세계 최초로 OLED TV를 개발한 것은 소니였지만 대형화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연구 개발을 게을리하면서 삼성 등에 우위를 내준 꼴이었다”

일본 가전 3사의 실적이 발표된 지난주 일본 주요 언론들은 이 같은 보도를 쏟아내며 위기감을 감추지 않았다.

일본 언론들은 고도의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모노즈쿠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데 긴장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모노즈쿠리 정신에 기반한 뛰어난 기술력으로 한때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으나 잇단 악재로 거액의 적자를 내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는 일본 제조업에 암운을 드리우는 것은 물론 대규모 구조조정을 수반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것으로 예상된다.

2011 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 소니 샤프 파나소닉 등 일본 3대 가전업체의 손실을 합하면 17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샤프는 지난 1일 2011년도에 2900억엔의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니는 2200억엔, 파나소닉도 사상 최악인 7800억엔의 적자를 예상했다.

엔고와 동일본 대지진·태국 홍수·유럽 재정위기 등 연이은 충격에 직격탄을 맞으면서 일본 제조업의 실적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조 개혁에 발 빠르게 나서지 못한 것을 이들 3사의 최대 패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들 가전 3사의 공통적인 취약점은 핵심인 TV 사업의 부진이다.

지상파 디지털화 완료를 경계로 일본 TV 시장 위축은 몇 년 전부터 예상됐다.

하지만 왕성한 태블릿PC 수요에 대응하느라 TV 사업의 부진을 만회할 여력이 없었다.

세계적으로 LCD TV 가격 하락이 멈추지 않는데다 32~42인치형은 가격이 4만엔대까지 떨어지는 등 가격경쟁 심화도 부담이 됐다.

수익성이 악화한 TV 사업을 대신할만한 신규 사업을 발굴하지 못하는 등 전략의 부재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소니는 한때 구원투수로 주목받았던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겸 최고경영자(CEO)를 밀어내고 히라이 가즈오 부사장을 새로운 사령탑에 앉혔다.

히라이 부사장은 아킬레스건인 TV 사업을 주축으로 소니의 회생에 사력을 다한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이 일본 모노즈쿠리의 붕괴 요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또 있다.

소비자들로 하여금 일본 제품을 사고 싶게 만드는 제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품이 충분히 차별화하지 않은 데다 이것이 치열한 가격 경쟁을 유발, 제품 라인이 너무 많아 소비자들의 기호가 변했을 때 재빨리 대응할 수 없다는 것도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일본 가전업계는 애플의 혁신성과 삼성전자의 제조력과도 대응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전략 컨설팅업체 롤랜드 베르거의 가미나가 마스기 파트너는 “과거를 돌아봤을 때 일본 가전업계에는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라면서 “일본 업계는 현재 어느 쪽을 향해도 가시밭 길”이라고 말했다.

가미나가 파트너는 1970년대 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과 현재 일본 가전업계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IBM처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아 번영하겠지만 이스트먼코닥처럼 안주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고 가미나가 파트너는 강조했다.

달러당 사상 최고치 부근에서 머물고 있는 엔고도 일본 기업의 만성 적자를 부채질하고 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달러당 75엔대 수준에서는 모노즈쿠리가 불가능하다”며 “일본 제조업은 전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가하마 이코노미스트는 “해외에서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되면 실업자가 10% 가량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

일본의 제조업과 그 정신 및 역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일본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문화에 기반해 일본 제조업이 번성한다는 가치관이다.

일본 고유의 표현이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과 언론들이 생산이나 제조를 의미하는 말로 활발하게 사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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