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상자산 시장, ‘국익’ 틀에서 접근을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산업성장과 경쟁력 확보 절실한데
법인참여 제한에 기술혁신 정체돼
금융기관과 ‘건강한 공존’ 추구를

가상자산 산업은 더이상 변방의 실험이 아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자산은 글로벌 금융의 중요한 축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전통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은행을 포함한 주요 금융기관들이 가상자산 시장에 직접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금융기관들은 단순 투자자로서의 접근을 넘어, 가상자산 수탁(Custody), 스테이블 코인 발행, 디지털 결제 인프라 구축 등 핵심 영역에 대한 사업 진출의 당위성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지난 8년 이상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를 제한해 왔다. 그 결과는 뼈아프다. 소수의 대형 거래소가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해 신규 사업자의 진입은 극도로 제한되고 기술혁신은 정체됐다. 그동안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허용하면 자칫 자금 세탁에 악용하거나 시장을 과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용자 보호법이 나오면서 법인의 시장 진입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올해 초 금융위원회 등 관계기관이 합동 발표한 ‘법인의 디지털 자산시장 참여 로드맵’에 따라 지난 6월 1일부터 일정 조건을 갖춘 국내 비영리 법인과 디지털 자산 거래소가 현금화 목적의 디지털 자산 거래를 하는 게 가능해졌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제도권 금융과 디지털 자산 생태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보완하며 시장을 공동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이후 대형 자산운용사가 디지털 자산을 포트폴리오에 포함하고, 세계 주요 은행들이 디지털 커스터디 및 스테이블 코인 결제망을 구축하는 사례는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금융기관의 시장 진입은 흑백논리로 볼 수 없다. 이들의 진입은 산업 전반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만, 동시에 기존 사업자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금융기관은 높은 재무건전성과 신뢰도를 바탕으로 시장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디지털 자산의 제도권 정착을 위해 필요한 ‘신뢰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규제 순응 의무와 관료적 의사결정 구조로, 혁신성과 민첩성 측면에서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비해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시장 적응력과 기술혁신 측면에서는 앞서 있지만, 상대적으로 리스크 관리 능력과 자본 건전성에서는 취약하다.

따라서 금융기관의 진입을 단순한 ‘허용’이나 ‘차단’의 문제가 아닌, ‘산업 아키텍처의 재설계’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제도권 금융기관은 수탁, 지급결제, 청산 등의 인프라 기반을 담당하고, 기존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프런트단 서비스와 기술혁신에 집중하는 ‘기능 분화형 협력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또는 민관 합작 구조나 공동 플랫폼 모델을 통해 시장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방향도 고려해봄 직하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의 해답은 ‘국익’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금은 특정 기업의 이해관계보다, 우리 산업의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더 중요한 시점이다. 산업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시장 파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대전제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 금융기관의 진입은 이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상자산 산업의 미래는 어느 한 주체의 전유물이 아니다. 산업과 금융, 민간과 공공이 역할을 분담하면서도 신뢰를 기반으로 협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도 디지털 금융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이제는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미래를 택할 것인가, 과거를 고수할 것인가. 이는 선택이 아닌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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