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추천 인사 구조, 정치 도구화 원인
역사 사례처럼 전체주의 위험 초래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과연 대한민국이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모범국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체제를 뒷받침해 왔던 이른바 권력 기구들의 허상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
선거를 통해 특정 개인이나 정치 집단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태생적으로 반민주성을 안고 있다. 다수의 선택이 곧 최선의 선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선출된 권력에 대한 견제 수단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 행위들은 대중에게 표를 구걸하기 위한 극장일 뿐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최근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정치적 갈등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 내재해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특히 대통령 탄핵으로 혼란스러운 한국 상황은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들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제도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악용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무너지면, 다수의 논리를 바탕으로 사악한 정치가 될 수 있음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도 우려했던 부분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다수의 폭력’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권력 기구들이 ‘다수의 힘’에 의해 지배되면,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반민주적일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치적 독립이나 다양성을 이유로 정파간 안배를 통해 구성된 기구들이 전체주의적 통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정파성에 매몰되어 상식을 벗어난 행태를 벌이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사법부마저 정치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 알게 만들었다. 이미 판사의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 결과가 뻔히 예견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은혁 재판관 임명을 둘러싼 일부 헌법재판관들의 모습은 향후 대통령 탄핵 심판이 추천 정파의 숫자에 의해 우열이 결정되는 조직폭력배 싸움처럼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사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행정부 내에도 여·야 추천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이 적지 않다. 특히 대통령 탄핵의 예고편이 되었던 방송통신위원회가 가장 대표적이다.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를 저지하려는 야당의 방송통신위원회 무력화에서 지금의 사태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지금 같은 방송 규제 기구와 공영방송 이사회의 정치적 안배구조는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통합방송법에서 만들어졌다.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공영성을 이유로 여·야가 추천해 구성하는 방송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후 방송통신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런 규제 기구의 정파적 구조를 바탕으로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여·야간 공영방송 이사 나누어 먹기가 관행이 된 것이다.
이는 집권 여당이 다수 이사진을 가지고 사장과 경영진까지 독식하면서 공영방송을 정치도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공영방송의 고질적 병폐인 정치적 편향성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결과 정권교체 때마다 공영방송 이사진을 바꾸기 위한 볼썽사나운 막싸움이 반복되고 있다. 공영방송 정상화는 정치가 방송에서 철수하는 탈정치화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방송통신위원회 이외에도 정치적 독립성이나 다양성을 명분으로 만들어진 각종 위원회들은 한결같이 정쟁에 휘말려 정부의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더 나아가 반민주적 정파가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면 입법 독재로 이어지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 1933년 다수 의석을 가지고 이상적이었던 바이마르 헌법을 붕괴시키고,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던 독일이 연상되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