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2연패에 빛나…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첫 금메달 획득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 미국 올림픽 전설로 남아있는 다이빙 영웅 새미 리가 2일(현지시간) 폐렴으로 별세했다고 미국 스위밍월드매거진이 보도했다. 향년 96세.
한국계인 새미 리는 1920년 8월 1일 캘리포니아 주 프레스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옥시덴털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지만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로 직장을 찾지 못해 중국요리점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새미 리가 12세 되던 해 가족들은 로스앤젤레스(LA) 인근으로 이사했다. 새미 리는 1932년 LA 하계올림픽을 기념해 걸린 깃발들을 보며 운동선수로의 꿈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157cm의 단신이었지만 몸이 민첩하고 공중제비를 잘해 다이빙 선수가 됐다. 인종차별로 연습장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유명 다이빙 코치 짐 라이원의 후원을 얻으면서 급성장했다. 새미 리는 1942년 미국 내셔널다이빙챔피언십에서 3m 스프링보드와 10m 플랫폼 부문에서 우승한다. 유색인종이 미국 다이빙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새미 리가 처음이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는 10m 플랫폼에서 금메달, 3m 스프링보드에서 동메달을 각각 획득한다. 이는 아시아계 미국으로는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4년 뒤 핀란드 헬싱키올림픽에서는 10m 플랫폼 2연패를 달성했다.
1953년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아마추어 운동선수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E. 설리번상을 받았다. 올림픽 다이빙 코치로도 활동했으며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과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의 업적은 스포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옥시덴털대를 거쳐 남가주대(USC) 의대를 졸업하고 1953~1955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국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LA 코리아타운에는 지난 2010년 새미 리 광장이 지어졌다.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