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너머] 결제 난민이 된 외국인 관광객들

며칠 전 명동의 한 식당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봤다. 일행 중 한 명이 애플페이 결제를 시도하자 식당 사장은 “우린 안 돼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제 수단이 막히자 일행은 허둥대기 시작했고 결국 한 명이 호텔까지 지갑을 가지러 뛰어갔다. 다른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지갑에서 원화 지폐를 꺼내 모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결제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이들은 한국 관광의 메카인 명동 한복판에서 ‘결제 난민’이 됐다.

이 장면은 불과 며칠 전 다녀온 싱가포르 출장 경험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싱가포르에서는 한 푼도 환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쓰던 카드 한 장, 그리고 카카오페이·네이버페이만으로 대부분의 결제가 해결됐다. 일부 매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낼 수 있었다. 이는 정부의 빠른 개방 정책과 명확한 규제 가이드라인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새로운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니 결제 생태계는 자연스럽게 혁신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다. 한국은 여전히 출발선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달 24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 제1소위원회에서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담긴 디지털 자산 기본법은 또다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를 두고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의 의견 대립이 좁혀지지 않아서다.

명동 결제 난민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 가게의 결제 방식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는 불편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역량을 갖추고도 결제 인프라에서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파편화돼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새로운 결제 기술 적용에 머뭇거리며 시간을 허비한다면 10년 뒤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현금을 찾아 뛰는 모습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탁상에서 시장 혁신성과 금융 안정을 조율하는 동안 우리는 ‘혁신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 결제 생태계 경쟁력의 핵심은 개방성과 속도에 있다. 정부는 시장이 안전한 틀 안에서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명확한 규제 기반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국회와 금융당국이 힘겨루기를 멈추고 혁신을 향해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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