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협상이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부는 협상 내내 ‘국익을 지키는 협상’을 전면에 내걸고, 외교·통상 라인을 총동원해 관세 충격을 최소화할 절충점을 이끌어냈다. 수차례 고위급 접촉과 실무 협의를 반복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 테이블을 붙잡은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그런데 이 과정의 이면에는 조용히 힘을 보탠 또 다른 축이 있었다. 바로 재계다.
과거에는 기업이 청와대의 일방적 요구를 감내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총수들이 불려가 술을 마시다 쓰러졌다”는 식의 회고담이 상징하는 장면처럼, 대통령실에서의 만남이 협력의 장이 아니라 압박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때가 불과 얼마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국익이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정부와 기업이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추는 정상적 파트너십이 작동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사실 한국 경제사는 정부와 기업이 함께 움직일 때 성과를 냈다. 정경유착이라는 비판이 그따라붙을 때도 있었지만, 위기와 도전 앞에서 정책과 자본이 동시에 작동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IMF 외환위기 극복,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반도체ㆍ자동차ㆍ조선 산업의 도약까지 모두 정부의 전략과 기업의 실행이 맞물릴 때 가능했다. 그렇기에 이번 정부 들어 정부와 기업의 협력 속도가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작지 않다.
실제 한미 관세협상 후속 논의를 위해 주말에 대기업 총수들이 총출동한 회동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와 기업이 이 정도로 보폭을 맞춘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업인들의 협력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진심 어린 감사인사도 건넸다. 그만큼 협상 과정에서 기업이 담당한 역할이 작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사 인사 뒤에는 곧바로 과제가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대미 투자 강화가 국내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며 지방 투자를 포함한 국내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정책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당부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그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기업들로선 제로였던 관세가 최소 15%로 오른 만큼 부담이 훨씬 커진 것이 현실이다. 이는 단순히 비용 증가뿐 아니라 앞으로의 투자 전략, 글로벌 공급망 선택, 생산기지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수다. 정부는 “전 세계가 똑같이 당하는 일(관세)이어서 객관적 조건은 변한 게 없을 것 같다”라고 설명하지만, 기업이 체감하는 압박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재계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삼성·SK·현대차·LG 등 7대 그룹이 향후 3~5년 800조 원이 넘는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또 청년 6만 명 신규 채용, 협력사 관세 부담의 소급 지원, 지역·지방 투자 확대 등 방안도 내놨다. 이는 한국 경제의 기반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기업들의 전략적 결단에 가깝다.
이제 공은 정부로 넘어왔다. 이 대통령은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열겠다”며 재정 지원, R&D 투자 확대, 후순위 투자 등 새로운 방식의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단순히 규제를 풀겠다는 선언을 넘어, 정부가 리스크를 함께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실행’이다. 정책은 속도와 일관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신뢰를 잃는다. 기업이 먼저 결단을 내린 지금, 정부가 얼마나 신속하게 지원 체계를 갖추고 규제 혁신을 현실화하느냐가 중요하다.
기대는 낮지 않다. 출범 초기 우려와 달리, 이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기조는 의외로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념보다 실용, 구호보다 실행, 목표보다 성과를 내세운다. 이에 이 대통령을 직접 만난 재계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에 대해 "만만치 않지만 대화가 통하는 대통령"이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이들 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 혁신, 산업 재편, 신성장 전략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입법·행정·사법을 아우르며 보기 드문 추진력을 갖춘 정부다. 지금이야말로 역대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던 과제를 끝낼 수 있는 시기다. 기업은 이미 움직였다. 이제 정부가 응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