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50년 사사(社史)...우여곡절의 사연들

입력 2006-09-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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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종건 회장, "마차로 자갈 날라 공장문짝 달아 세웠다"

SK라는 사명은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에서 선경의 앞 글자 영문 이니셜을 따왔다. 사실상 그룹의 시초였던 선경직물은 193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鮮滿綢緞)과 일본의 교토(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상호도 선만주단의 '선'자와 교토직물의 '경'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고 지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경직물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고 최종건 회장은 한때 몸담았던 선경직물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부친 몰래 빼낸 땅문서로 공장을 불하 받았다. 이후 선경직물은 나일론 생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섬유기업으로 탈바꿈하면서 오늘날의 SK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됐다.

매출 60조원의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 50년 동안의 과정을 소개한 SK사사(社史)를 보면 현재의 SK가 있기까지 숨겨진 수많은 우여곡절을 엿볼 수 있다.

오너의 피와 땀과 임직원의 열정과 노력이 밑거름이 돼 '하늘의 뜻을 알고 행동한다’는 지천명의 SK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0년의 세월을 보낸 SK의 성장사를 다시 짚어 봤다.

◆ 맨손 창업

SK그룹의 모태가 된 선경직물 공장은 6.25전쟁 후 폐허더미로 전락했지만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마차로 자갈을 날라 다시 세워졌다. 최 회장은 직접 공장 문짝까지 달았다.

고 이용진 전 선경직물 전무는 생전에“요즘에야 건설회사가 공장을 짓지만 1953년 선경직물 공장은 종업원들이 최종건 회장의 마차를 이용해 5킬로미터 떠어진 광교천에서 돌과 자갈을 날라 만들었다”면서 “무거운 앵글이나 파이프도 모두 종업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나르는 등 수원공장은 창업주와 종업원이 손으로 만든 공장이었다”고 회고했다.

선경직물 설비 초기에는 회사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할 단계이다 보니 관련 전문지식을 습득한 직원들이 전무했다. 대부분 견습공이었기 때문에 최 회장이 나서서 일일이 일을 가르쳤다. 기계가 고장나도 수리할 수 있는 직원이 없어서 최 회장이 직접 나가서 부품을 구해오고 수리해서 공장을 돌렸다.

이러한 산고를 통해 공전의 히트작으로 평가받는 인조견 ‘루스터’(Rooster, 장닭)가 탄생했다. 이 옷감은 ‘지누시’(양복을 만든 후 안감이 줄어들지 않도록 재단을 하기 전에 세탁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일본말)를 하지 않고 재단이 가능한 당시로서는 유일한 안감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직물공장이 제고가 쌓이며 제품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을 틈도 없이 팔려 나갔다. 실제로 당시 선경직물의 안감을 모방한 짝퉁 ‘닭표’안감이 나올 정도였다.

최종건 회장은 닭표에 그려진 장닭의 그림을 직접 고안했고 ‘선경의 제품’이라는 제조원을 분명하게 밝히며 일찍부터 브랜드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경직물은 나일론 직물생산을 시도하면서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혔다. 그중 하나가 나일론 원사에 풀을 먹일 때 발생하는 정전기 문제였다. 고심 끝에 김영환 상무는 미국, 일본의 유명 합섬회사에 편지를 띄워 사이징(Sizing) 기술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어느 회사에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당시 국내 유일의 나일론 직물 생산업체였던 태창직물에서도 나일론 원사의 사이징 기술을 쉬쉬하고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지인인 극동건설 김용산 사장을 통해 정전기 방지기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려 했다. 자재 구입을 위해 일본 출장이 잦았던 김 사장은 일본 동경의 어느 한국 음식점 주인에게 선을 대어 나일론 원사에 윤활유를 바르면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음식점에 드나드는 손님 중에 나일론 직물 회사의 직원이 있었던 것이다.

김 사장은 이렇케 입수한 고급정보를 최 회장이 대접한 ‘술 한잔’에 넘기고 말았다. 최 회장이 그날 술 값으로 지불한 금액은 단돈 10만환. 이 비화는 ‘10만 환에 인수한 나일론 원사 제조기술 정보’라고 그룹 내 회자되고 있다.

◆ 패기와 지성의 만남

1960년대 초 선경직물은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다. 최종건 회장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동생의 귀국을 부친과 함께 종용했다. 최 회장은 결국 10여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선경직물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SK는 패기(최종건)와 지성(최종현)의 쌍두마차 체제를 갖췄다.

패기와 지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게 된 것은 두 형제의 전혀 다른 스타일이 배경이 됐다. 지인들은 “소리없이 일을 꾸미는 사람은 최종현이요, 밖에서 박력있게 뛰는 사람은 최종건이었다”라고 평가를 할 정도였다.

최종현 회장은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하면서 그룹의 수직계열화를 완성시키고,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해 정보통신 사업 을 한 축으로 만들어 두 번의 큰 도약을 이뤄냈다.

이러한 성공 뒤엔 치명적인 위기를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대연각빌딩 화제와 오일파동이 그것이었다.

극동건설이 건립한 대연각 빌딩은 1969년에 준공돼 당시로서는 최신시설로 각광을 받는 고층빌딩이었다. 화제당시 대연각 빌딩에는 선경직물, 선경화섬, 선경합섬 등이 계열사 서울 사무소로 입주해 있었다.

대연각 빌딩의 화제로 선경은 보관 중이던 현금과 유가증권, 신용장과 인사카드, 출고관계 증빙서류 등 일체의 기록 장부가 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거래처 대부분이 거래 내역을 자진해서 알려줘 거의 대부분의 매출실적을 잃지 않았다.

한번은 선경이 부도 위기까지 맞을 때가 있었다. 당시 박영수 전 선경 사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입국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면서 부도를 겨우 막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뉴욕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회사 부도를 막기 위해 미국에서 300만 달러를 빌려 1972년 1월1일에 입국했습니다. 너무 급히 오느라 회사에 입국 사실을 알리지 못했고, 대연각빌딩 화재 이후 선경 본사가 어디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연휴가 끝나기 전까지 자금을 전달하지 못하면 회사는 부도가 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1972년 입국한 첫 한국인이라고 라디오에 방송이 되면서 회사가 나의 입국 사실을 알게 됐고, 사장님이 집으로 전화를 하셔서 무사히 돈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최종현 회장의 기술에 대한 집념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1965년 까칠까칠하면서도 통풍이 잘되는 이른바 ‘깔깔이’ 원단을 시행착오를 거쳐 직접 개발했다. 식당 종업원이 입고 있는 ‘깔깔이’ 원단을 본 뒤 일본 이토추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으려 했으나 이토추사측이 거절하자 원사에 가하는 압력과 가열온도, 가열회수 등에 대해 무수한 시험을 거쳐 최적의 조건을 찾아낸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1974년 선경합섬 생산부에서 시행했던 품질관리 운동인 BEST 운동을 그룹전체로 확대하는 등 현재 SK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를 하나씩 정립해 나갔다.

최종현 회장이 BEST 운동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자기계발과 자기혁신으로 모든 것을 개선해 나간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안될 것이 없다. 우선 하면서 배운다 ▲서로의 장점을 찾아 길러주어 신뢰하는 직장을 만든다는 등의 5가지 사항은 현재의 SKMS의 의욕관리 모태가 됐다.

SK그룹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손길승 전 회장을 빼놓고 얘기 할 수 없다. 손 회장은 신입사원에서 전문경영인으로서 그룹 회장까지 올라선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1965년 12월 SK에 먼저 입사한 대학동기 이순석 전 사장의 권유를 받고 최초의 대졸 신입사원으로 SK에 합류했다. 지난 1998년 최종현 회장의 타계 이후 최태원 회장과 함께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파트너십체제 구축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태원 회장의 이동통신 사업진출도 SK그룹 역사의 한 '획'이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당시 미국에서 부상하고 있던 정보통신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향후 SK의 주력사업으로 정보통신을 꼽고 미국 근무 중 정보통신사업을 위한 기초 공부를 착실히 했다.

1994년 귀국후 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에서 근무하면서 SK가 이동통신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해 숨겨진 경영능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그룹을 승계의 토대를 닦았다.

당시 최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소영씨와 결혼하면서 큰 반향도 불러일으켰다.

■'SK의 50년 사사’ 어떻게 구성됐나

사사(社史) ‘SK 50년 패기와 지성의 여정’은 지난 1953년 3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매출 60조원의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 50년 동안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1380여 쪽 광대한 분량의 사사는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을 인수해 SK그룹을 일으키는 ‘맨손의 창업’편을 시작으로, 최종현 회장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SK에 합류하는 ‘패기와 지성의 만남’편,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하면서 수직계열화를 이루는 ‘수직계열화의 완성’편,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의 두 날개’편 등 7부 22장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사사에는 2003년 그룹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SK 100년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복추구경영 등 최태원 회장의 경영철학도 자세히 담겨 있다.

시대순으로 정리된 사사에는 전·현직 임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일화가 담겨 있다.

수 백장의 자료사진 및 인물사진 중에는 1962년 11월 선경직물 수원공장 준공식에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이 참석하는 사진 등 그 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 등도 게재됐다.

퇴직 임원들의 인터뷰 코너에는 그룹 성장시 겪었던 성장통에 대한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SK 기업문화실 권오용 전무는 “SK 50년사는 SK의 시련과 영광, 미래비전을 생각하는 중요한 자료”라며 "옛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앞으로 SK그룹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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