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노인빈곤·영세 자영업자·비정규직 문제 등 산적…‘소득 주도 성장론’ 목소리 확산
블랙스완이란 발생 가능성이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큰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경제현상을 말한다. 반면 그레이스완이란 충분히 알려져 있고 예측이 가능한 위험 상황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인사는 한국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등을 모범적으로 극복한 저력을 지녔으면서도 장기적으로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해 내지 못하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경제가 저성장 국면의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 주된 원인을 국민 다수의 소득 정체에서 찾는 분석이 많아지고 있다. 장기화된 청년실업과 노인들의 극심한 빈곤, 근로 형태와 직장규모에 따른 소득격차, 벼랑 끝에 몰린 영세 자영업자 등이 맞물리며 경제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야기된다는 것.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이 같은 고질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자리 없는 청년, 돈 없는 노인, 직장인도 불안 = 청년실업 문제는 한국경제의 대표적인 ‘그레이스완’이다. 통계청의 고용동향 자료를 보면 전체 고용률은 전년 대비 0.4% 증가한 60.9%인데 반해 57.5%로 오히려 전년 대비 0.1% 감소해 여전히 회복의 기미가 미미한 상황이다. 특히 공식집계에는 잡히지 않는 불완전 취업자, 취업포기자 등 포괄적 실업에 해당하는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 상황은 드러난 수치보다 심각하다.
청년실업은 만만치 않은 문제다. 그 자체로도 소비수준의 위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의 장래를 생각할 때 각종 연구 결과에서 나타나듯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된 직업을 보유하지 못한 청년층은 10~20년 뒤 중장년층이 된 이후에도 경제적인 기초단위로서 기능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잠재적인 경쟁력을 고스란히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마땅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의 빈곤은 청년실업의 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가별 빈곤율 통계지표를 보면 한국의 노인빈곤은 2012년 말 기준 48.5%로 압도적이다. 가장 낮은 네덜란드(1.5%)의 약 32배, OECD 평균(10.5%)의 약 5배다. 한국보다 먼저 저성장을 겪은 일본에서는 노령층의 소비가 그나마 경제를 지탱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소비계층 붕괴… 벼랑 끝 몰리는 영세자영업자 = 청년실업과 노인빈곤이 ‘직업’의 범주 밖의 문제라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따른 소득격차 문제는 또 다른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2000년대 중반 20%초반에 머물렀던 비정규직 비율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줄곧 30%대에 머물러 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와 중소기업의 임금수준도 해를 거듭할수록 확대되는 추세다. 전체 고용의 80% 이상을 중소기업에서 창출하고 있으므로 전체 봉급생활자들의 임금총액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소비계층의 전반적인 위축은 자영업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된다. 베이비붐 세대와 청년 실업자가 나란히 자영업에 뛰어들며 전체적인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전반적인 소득마저 줄어들게 된 것. 벼랑 끝에서 등을 떠밀리는 모습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자영업자 비율이 OECD 최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높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위기 때에는 분배구조가 악화돼 근로자 몫이 줄어든다”며 “자영업 경기가 나빠 개인사업자의 사업소득이 악화된 점도 가계 소득이 정체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진단했다.
실제 자영업자들이 처한 어려움은 소득으로 확인된다. 국세청에 2012년 소득을 신고한 개인사업자 395만700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221만6000명(56.0%)의 월 소득이 100만원 미만이었다. 통계청의 자료를 봐도 자영업자의 2012년 기준 가구소득은 5007만원으로 임금근로자(5525만원)보다 적었으며 자영업자의 빈곤율은 13.1%로 임금근로자의 4.4%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우리경제가 처한 이 같은 문제들의 핵심이 ‘골고루 잘 살지 못하는 발전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임금을 낮추고 기업의 이윤을 높임으로써 투자와 수출을 촉진해 경제성장을 하자는 수출·대기업 중심의 성장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이 최근 ‘가계소득 증대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표방한 것도 이 같은 인식이 깔려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경제정책이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등 가계의 소득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소득 주도 성장론’의 목소리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지난 10년간 미국과 유럽이 가계소득을 높여 국민 삶의 질에 가장 긍정적 효과를 미친 게 최저임금 인상”이라며 “정부 정책이 단순히 고용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 등 고용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