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 정착 성공사례]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귀촌원칙 필요해요”

입력 2014-05-3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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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으로 귀촌한 집성촌 며느리 경기 양평의 신희정 씨

30대에 결혼하면서 경기 양평은 막연한 환상이었다. 그저 서울에서 가깝고 재테크에 유리한 부자동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씨 집성촌인 그곳에서의 생활은 도시와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하나하나 배우고 소통하면서 이제 귀촌생활의 원칙을 제시할 줄 아는 지혜로운 며느리로 거듭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몰이해의 세계였던 신혼초 =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삶을 시작하자마자 환상과는 작별을 했다. 그게 아무래도 귀농귀촌의 제일 처음이 아닐까 한다. 가족의 구성원이건, 마을의 구성원이건 귀농귀촌을 처음 할 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환상과의 작별이다.

서른이 넘도록 시골이나 농사와는 거리가 멀던 내가 서른을 넘겨 결혼을 전제로 만난 남자는 전형적인 시골 촌놈(?)이었다. 농사만 짓는 사람도 아니고, 그가 사는 곳이 그렇게 촌이라는 생각도 없어 결혼을 결정하는데 지역이 그렇게 큰 어려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농촌에서의 신혼생활은 하나부터 열까지 몰지각, 몰이해의 세계였다. 내가 사는 곳은 양평읍에서 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농가주택으로 오밀조밀 비슷한 모양의 주택들이 20여 가구 모여 있다. 이 집들이 지어질 시기에는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에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전주 이씨 집성촌’이기 때문이었다.

집을 지을 무렵에는 모두 전주 이씨 한 집안이어서 대부분이 남의 집 숟가락 갯수며 모양까지 알정도로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그런 관계는 내가 결혼하고 이 곳에 터를 잡은 지 8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조금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단단하다.

한 달 쯤 지났나? 그날도 난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가고 있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혹은 한 시간 반에 한 대, 그걸 기다리는 동안은 동네 할머니들의 눈길과 질문을 피할 곳이 없었다. 결혼 전 직업이 뭔지, 아이는 얼마나 낳을지, 어디서 살았는지, 공부는 얼마나 했는지 등의 직접적인 질문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고, 눈길로 사람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할머니들은 내 옷차림과 머리 그리고 화장이나 신발 등 을 훑어 내려갔다.

이미 시아버지도 용인하신 반바지와 가방과 옷차림에 어울리는 힐을 보신 할머니들은 번갈아 집에 들러 시어머니께 며느리 단속을 말씀하셨고 그건 곧바로 내 귀에 잔소리가 되어 흘러넘쳤다. 그럼에도 아랑곳 안하려고 한 내게 어느 날 옆집

할머니가 직격탄을 날리셨다.

“옷이 그게 뭐야? 치마는 짧고 색은 요란하고, 머리는 너무 길지 않아? 그리고 신발은 그게 뭔가? 다른 사람들이 욕해!”

서울에 일이 있어서 정장차림으로 입고 길을 나서던 내게는 날벼락이었다. 그런 일을 몇 번 겪다보니 이 집성촌이라는 곳에 대한 환멸 같은 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들이 많은 거지? 이 동네 분들은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사시나? 결혼하고 4개월 정도 지날 무렵 이런 생각들이 들자 우울증까지 오기 시작했다. 멀쩡하고 화려한 도시를 두고 내 발등을 찍었구나 하는 생각에 버거웠다.

◇집성촌의 색다른 모습에 눈을 뜨다 =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동안 농촌이 바쁜 계절이 됐다. 이미 겪을 만큼 겪은 동네 어른들의 시선과 잔소리에 낮에는 최대한 청바지와 평범한 티로 무장하고 머리는 항상 묶어서 핀으로 고정시키고 지내기 시작한 어느 초여름 날, 집성촌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유난히 해가 뜨거운 날이었다. 읍내에서 볼일을 다보고 들어오니 갈증도 심하고 끈적거렸다. 시원한 커피한잔을 타서 소파에 앉자 여유롭게 커피를 반쯤 비울때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의 아줌마 한분이 급히 들어와 정면으로 보이는 야외 화장실에 들어갔다.

분명 마을 초입에 사시는 분인데 왜 남의 화장실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는 건지 화가 나기도 하고 급한가 보다 이해가 가기도 하며 오락가락해 하는 사이, 아줌마는 볼일을 다보고 편안한 얼굴로 나왔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수도로 가서 손과 신발을 닦고 마치 자연스럽게 자기 집에서 나가듯 마당을 빠져나갔다.

‘급하셨나 보네’로 내 생각을 매듭짓고 내일까지 봐야 하는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아 보낸 시간이 세 시간 정도인가? 화장실과 수도를 사용하고 사라지는 동네 어른들은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오늘만 그런 건 지 평상시에도 그런 건 지 알 수가

없어 늦은 저녁식사 시간에 반은 투덜거리는 어조로 낮의 일을 이야기 하자 시아버지는 그걸 아직 이해 못했냐는 듯 내게 핀잔 섞인 조언을 남기셨다.

“마당에 창고를 짓고 여유가 있는 집들은 마당에 화장실을 놓은 이유가 바로 그거다. 일하다가 집에 들어와 화장실에 가면 먼지도 묻고 일하다 집까지 간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경운기 타고 가야 하는 데 화장실 한번 오자고 집에 오겠냐? 우리

도 일 나갔을 때 급하면 근처 집에 가서 볼일을 본다. 그러니 마당의 화장실이라도 개방을 해놔야지. 말이 나온 김에 미리 이야기하자. 지하 냉장고에 음료수랑 물은 떨어지지 않게 놔라. 마실 오는 사람들 마시고 쉬다 갈수 있게. 간간히 우리 생각해서 간식도 넣어두면 좋겠구나. 그게 현명한 시골살이다.”

밖의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시는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지하 냉장고에 내가 사놓지 않은 음료며 찐빵 같은 것들이 왜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우리 마을은 사방이 다 논이고 밭이다. 그리고 그 마을 중심에 있는 삼거리에

우리 집이 있다. 사방에서 일하시다 뛰어오기 좋고 농가주택으로 지을 때 반 지하를 지상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 시원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돼 있다. 공간 활용이 좋아 한 켠에 있는 방에는 문을 달아 간이침대를 놓아두고 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힘드시거나 덥다고 느끼실 때 오셔서 쉬실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지하에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크기의 냉장고에 음료와 물 그리고 간단한 간식이 항상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사다 놓기도 하지만 동네 어르신들이 장날 하나 둘 사다 넣어 놓기도 하셨다. 다들 나름대로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었다.

시어버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전형적인 농사꾼은 아니셨다. 은행원 생활을 하시고 정년을 하시면서 훈장도 하시고 농사도 지으시는 시골에서는 엘리트 대접을 받으시는 전형적인 지역 양반이셨다. 시아버지의 넓은 시야는 본인의 경험도 한몫하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직장생활과 시골생활의 조화가 시아버지에게는 있었다.

◇먼저 베풀고 먼저 손해 보는 게 시골살이 = “시골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뿐 아니라 나이 먹은 사람들도 시골은 베푸는 곳, 풍요로운 곳,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시골사람도 그냥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돌봐주고, 이해해줘야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만큼 서로에 대한 애착도 강해 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싫어한다. 또 땅만 보고 살아서 고지식하고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농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네가 노력하고 베풀지 않으면 그 간격은 줄지 않는다. 내가 겪어보니 도시사람들도 많이 배우긴 했지만 시골살이에 그리 현명하지는 못한 것 같더라. 힘들겠지만 그래도 살다보면 매일 문 걸어 잠그고 사는 도시보다는 좋은 점이 많단다. 도시랑 시골에서 내 인생의 반씩을 살아보니 네게 해줄 말이 네가 먼저 풀어라, 손해봐! 그거뿐이구나.”

내가 시골반 도시반의 생활 형태를 띤 이곳 양평에 정착한지도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시골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보듬어 주신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양평에는 지하철이 들어왔다. 이제는 일하시는 시어머니 새참으로 새우버거를 챙겨가면서 풀독 오르지 않게 긴바지를 입을 줄 알게 됐고, 고추를 따서 청량리 시장에 넘기기 위해 밤에 상회차를 기다릴 줄 알게 됐다.

귀농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농사법이며 새로운 농작물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들이 도시에도 많고 시골에도 많다. 실제로 나도 관심이 많아서 수업을 들어봤고, 여러 견학지를 견학해보기도 했다. 펜션을 해볼까하고 돌아다녀보기도 하고, 부동산모임에 가입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은 이런 프로그램이나 견학지에서 본 것들이 아니다.

◇외모와 사고에 대한 지적을 즐겁게 받아들여라 = 바로 나눌 준비가 되어 있냐는 것이고 농사가 아닌 다른 직업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영양부추와 고추를 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이 시어머니가 하시는 걸 거드는 수준이고 시어머니도 힘이 드셔서 모종을 못하고 구매를 해서 하고 있다.

난 대신 이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곳들이 그렇듯 이곳도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귀촌을 하는 이들 중 아직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인들과 관련된 일들이 가지를 치고 있다. 난 도시에서 살아본 경험과 시골에서 며느리로 겪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시아버지가 주신 조언들을 토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조금은 느슨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가령 내 땅이지만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은 한 남이 사용하는 것을 적당히 용인해줘야 한다. 때론 그것이 집 마당의 화장실이 되기도 하고 지하의 냉장고가 되기도 하고 내마당과 인접한 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전기세나 정화조 청소비용은 감내해야 한다.

그런 것이 선행되어야 내 집을 새로 지을 때 도로를 사용하는 사용권을 얻어내는 데 문제가 없고 집을 짓는 동안의 소음을 견뎌내 주는 것이고 처음 농사를 지을 때 좋은 모종을 얻는 지름길이고 판로를 개척하는데 도움을 받는 길이다. 귀촌에서 그것만큼 소중하고 유용한 투자와 기술은 없다. 기꺼이 자신의 외모와 사고에 지적질(?)을 즐겁게 소화하겠다는 강한 다짐을 하고 시작하는 것, 그게 바로 젊어서 본의 아니게 귀촌을 한 내가 제안하는 최고의 귀촌철칙이다.

<신희정씨의 귀촌이야기>

·귀촌 전 거주 지역: 인천

·귀촌 전 직업: 이벤트 관련 회사

·귀촌 결심동기: 결혼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촌연도: 2005년

·귀촌 시 나이: 33세

·귀촌지 선택사유: 시댁

·귀촌시 영농기반: 없음

·귀촌 초기자금: 없음

·현재 영농규모 : 없음

·연간 수익: 4500만원(교육 관련 일)

<출처: 농림축산식품부 발간 귀농·귀촌 수기모음집 ‘촌에 살고 촌에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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