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파워엘리트 50인]김무성 새누리당 전 의원, 위기때마다 빛났던 창업공신… 박 당선인 첫 특사 낙점

입력 2013-01-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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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전 의원(전 선대위 총괄본부장)
새누리당 김무성 전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 오는 22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중국특사단으로 파견된다. 박 당선인의 첫 특사단을 맡게 됨으로써 박 당선인의 김 전 본부장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다시 확인됐다.

김 전 본부장은 친박(친박근혜)계에서 비박(비박근혜)계를 거쳐 다시 친박으로 돌아온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가 친박으로 돌아온 계기를 보면 남다른 점이 있다. 지난해 4·11 총선에서 김 전 본부장은 박 당선인으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했다. 주변에서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백의종군’의 길을 선택했다. 김 전 본부장은 총선에서 부산·경남(PK)에서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야당으로부터 PK지역을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8대 대선에서도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조직을 다잡는 모습을 보여줬다. 보스 기질이 강한 김 본부장은 선대위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면서 박 당선인에게 대통령직을 안겨줬다.

◇어린 시절 ‘정치’에 눈 떠 = 새누리당 김무성 전 본부장은 고등학생 때부터 ‘정치’에 빠져들었다. 그는 제5대 참의원 출신인 아버지 고(故) 김용주 의원으로부터 정치를 몸으로 배웠다.

김 전 본부장은 “초등학생 때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승만 물러가라’고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뭔가를 알고 행동했다기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정치가 아니라 사업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그는 포항에서 형이 운영하는 동해제강에서 5년 간 정치를 잊고 살았다. 천성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5·18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와 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

김 전 본부장은 1983년 당시 야당 지도자이면서 경남중학교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정치권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의 실질적인 정치인생은 1987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총무국장에 원내총무실 행정실장, 민주자유당 의사국장·의원국장, 기조실차장 등을 거쳤다.

14대 대선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의 정책보좌역과 대통령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비서관, 내무부 차관 등을 역임하면서 ‘상도동계’로 분류됐다. 그 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서 이회창 총재·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박 당선인과 2005년 첫 만남 = 김 전 본부장은 2005년 초 박 당선인을 처음 만났다. 당시 당 대표였던 박 당선인은 “원내대표를 맡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김 전 본부장은 “당에 3선이 나를 포함해서 27명이나 되는데 내가 맡으면 당이 바로 되겠느냐”고 말한 뒤 강재섭 전 대표를 추천했다. 그 후 김형오 국회의장 후임으로 사무총장을 맡으라고 한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가까워졌다.

김 전 본부장은 박 당선인에게 “차 한잔 나눈 적이 없는데 왜 중책을 맡기려고 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그러자 박 당선인은 “오랜 기간 유심히 지켜봐 왔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당선인과 김 전 본부장의 신뢰는 2005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깊어졌다. 재보선에서 ‘40대 0’의 신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에서 공천을 3번 할 때 박 당선인과 김 전 본부장은 공천심사위원들에게 전화 한통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전 본부장은 적자를 보던 당을 흑자로 만들기도 했다. 사이버 정당 순위에서 꼴찌였던 것을 1위 반열에 올려놓았다. 구조조정 차원에서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반납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활약에도 불구, 박 당선인은 대선 후보 경쟁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에게 후보자리를 내줬다.

◇ 위기…백의종군으로 신뢰 회복 = 김 전 본부장은 2007년 박 당선인의 선대위 총괄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했다는 점때문에 18대 총선에서 이른바 ‘친박계 공천학살’의 희생야이 돼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4선 의원이 됐다. 복당 뒤 친박계를 이끌었으나 2009년 원내대표 경선 이후 박 당선인과 관계가 멀어졌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예산’ 통과를 주도했다.

김 전 본부장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박 당선인과 대립하면서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박 당선인이 세종시 이전 원안고수를 주장하는 반면 김 전 본부장이 절충안을 공개적으로 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4·11 총선을 치르면서 화해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 전 본부장이 총선 전 ‘백의종군’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린 뒤 박 당선인에게 힘을 실어줬다. 백의종군을 선언한 후 김 전 본부장은 야당이 집중 공략키로 한 부산·경남의 ‘낙동강전선 수호’에 온힘을 쏟았다. 박 당선인은 당시 “부산사나이 다움을 보여줬다. 감사한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그는 18대 대선에서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맡아 정권 재창출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 그는 당의 대선 3대 기구인 국민행복추진위·정치쇄신특위·100%대한민국 대통합위를 지원하는 중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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