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콴트가문, 파산직전 위기 BMW의 구원투수

입력 2011-06-0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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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명차브랜드 BMW의 최대주주, 벼랑 끝으로 몰린 회사를 되살린 구원투수, 전문경영인 발굴의 귀재.

20세기 이후 독일 최대 부호인 콴트(Quandt) 가문에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콴트 가문은 지난 1959년 경영이 불안하던 BMW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재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항공기 엔진 개발 업체로 출발한 BMW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경쟁사 벤츠에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타난 것이 헤르베르트 콴트였다.

BMW와 벤츠의 지분 모두를 보유하고 있던 콴트 가문은 원래 BMW 매각을 지지했다.

헤르베르트는 그러나 독일 유력은행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산을 모두 쏟아부어 BMW의 지분 50%를 사들인다.

BMW가 보유한 기술력과 미래 성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독자 생존을 외치던 소액주주들의 입장을 배려한 결정이었다.

헤르베르트는 도박이라는 당시 세간의 비난을 이겨내고 BMW를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명품 자동차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의 기업가적인 배짱은 부친 권터 콴트로부터 물려받았다. 네덜란드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밧줄 및 섬유업체를 기반으로 사업을 키워 나가던 귄터는 당시 인수·합병(M&A)의 귀재로 꼽혔다.

헤르베르트는 어렸을 때 망막 질환을 앓아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까닭에 교육도 집에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콴트 가문의 국내외 사업체에서 현장교육(OJT) 형식으로 경영수업을 받아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났다.

그는 시각 장애인에 가까운 시력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창업주 정신으로 자동차 사업에 사활을 걸고 BMW에 열정을 바친다.

콴트 가문은 최대주주임에도 회사 경영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해 전문 경영진에 최대한 힘을 실어주면서도, BMW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경영진을 최대한 지지하면서 일상적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실적악화로 기업을 위험에 빠뜨린 경영진에 대해서는 대주주로서 적극 개입하는 것이다.

콴트 가문은 1970~1993년까지 BMW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을 최고의 동업자로 키웠다.

하지만 1990년대 잘못된 M&A와 무리한 고용보장으로 BMW에 천문학적 피해를 끼친 베른트 피세츠리더 당시 회장을 경질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헤르베르트가 1982년 사망하면서 BMW의 지분은 미망인인 요한나와 자녀인 주자네, 슈테판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각각 16.7%, 17.4%, 12.6%의 BMW지분을 30여년째 유지하고 있다.

▲최근 1년간 BMW 주가 추이 (출처: 블룸버그)

미망인 요한나는 헤르베르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남편의 뒤를 이어 BMW 대주주가 됐고, 1982~1997년까지 감독이사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도 헤르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일상적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대규모 투자 안건 등 주요 사안에 대주주 권한을 적극 행사하고 있다.

콴트가문의 힘은 이원화된 경영 시스템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다.

평소 회사 경영에 전적인 권한을 가진 경영이사회와 이들을 견제하고 이사 선임 권한을 가진 감독이사회가 분리 운영되는 것이다.

감독이사회는 주주측 대표 10명 및 독일의 자동차 노조와 BMW 사원들이 추천한 노조측 대표 10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같은 인적 구성은 회사 경영의 객관성과 독립성, 그리고 사회적 대표성을 담보로 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최대주주 콴트 가문에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다.

콴트 가문은 또 언론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로 유명하다.

콴트 가문의 두 자녀 슈테판과 주자제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BMW에 입사했다.

그러나 함께 근무한 직원들 중 누구도 그들이 대주주 일가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언론에 노출된 적도 없을 뿐더러 회사에서는 가명을 사용하며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직원들과 어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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