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세일즈맨의 자화상

입력 2011-03-10 11:00수정 2011-03-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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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찬 부국장 겸 스포츠레저부장

풍경1.

퇴근길이다. 건물사이로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어둠이 내리고 샐러리맨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지치고 피곤이 묻어난 얼굴과는 달리. 잠시 그들은 고민한다. 어디로 가나. 딱히 갈 곳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한 잔 할까?” 말뿐이다. 어떻게 한 잔만 하나. 가까운 곳을 찾는다. 자리를 잡자마자 안주도 오기 전에 술잔을 기울인다. 술잔이 돌면서 말이 많아진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대부분 현재의 현실보다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많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짜릿한 말도 안 되는 미국 영화 ‘백 투 더 퓨쳐’처럼. 주제가 없다. 어느 말이나 다 된다. 그래서 재밌고 시간을 한강물처럼 흘러간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혜은이의 ‘제3 한강교’노래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입에 거품을 물고 간간이 침을 튀긴다. 뭐라 지껄여도 모두 맞다. 밤은 깊어가고, 목소리는 커지고, 돌리고 돌던 술잔을 스스로 무너지고, 그렇게 시간은 샐러리맨들을 어둠속으로 몰아간다. 아니, 기억 저편으로. 결국 샐러리맨은 이상과 현실의 문턱에서 더 이상 샐러리맨이 아닌 세일즈맨으로 태어난다.

풍경이나 풍광이 변하듯 시간을 그렇게 후딱 간다. 잡아도 가고 가지 말라고 애원해도 도망간다.

풍경2.

산에 오른다. 아직도 잔설(殘雪)이 남아 있다. 풍광은 이제 갓 겨울을 벗은 듯하다. 하나 둘 등산객이 늘면서 숨도 가빠진다. 오르막이다. 늘 다니는 길이건만 항상 새롭고 어색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다. 늘 만나는 나무와 바위,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시간에 따라 다르다. 변화의 옷을 입고 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늘 비슷한데 풍경이 다른 것은 보는 이의 생각이 달라서 일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름 모를 새싹이 돋을 터. 매서운 바람과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그리고 발목을 덮는 눈까지. 이런 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그들도 봄을 맞는다.

산에 오르는 술꾼은 결국 내려와서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어제 저녁 포장마차에서 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실소(失笑)를 한다. 자신을 담보로 시간을 팔아서 살아가는 샐러리맨은 결국 세일즈맨으로 귀결되고 하산을 앞둔 발길은 무겁고 무뎌진다.

시간을 잠시 되돌려 1940년대 ‘세일즈맨의 죽음’을 더듬어 보면 ‘샐러리맨이 세일즈맨 화’되면서 죽어가는 현실을 실감나게 맛볼 수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 부제가 ‘어떤 2막의 사적(私的) 회담과 진혼가(鎭魂歌)’이다. 1949년 발표했다. 퓰리처상, 연극비평가상, 앙투아네트 페리상 등 3대 상을 수상한 최초의 작품이다.

지금이야 뻔하고 싱거운 내용. 주인공 윌리 로만은 원래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고 일을 좋아한다.그는 성공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세일즈맨의 길을 걸었다. 성실하고 자랑스런 30년간의 세일즈맨 생활. 그의 두 아들 비프와 해피에게도 그의 신조를 불어 넣으며 그들의 성공을 기대했다. 그러나 두 아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타락했고 그도 몰인정하게 해고당한다.

궁지에 몰린 그는 장남에게 보험금을 남겨 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고 매일 다투어 온 비프와 화해하던 날 밤에 차를 과속으로 달려 자살한다. 사실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가 선택해야했던 결말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직장에서의 성공, 가정의 행복, 아버지와 남편으로써의 책임감으로 언제나 강해야만 했던 가장(家長)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이름.

그의 장례식날 아내 린다는 집의 할부금 불입도 끝나고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 이 집에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다고 그의 무덤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보, 날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슈. 울 수도 없구료. 어떻게 된 거유? 울음도 안 나오니. 정말 알 수 없구료. 뭣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유. 날 좀 도와줘요. 울 수도 없다니까요. 또 출장 가신 것만 같구료. 돌아오시려우. 여보, 왜 울 수도 없을까요.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했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구료. 오늘 마지막 집세도 냈다우, 오늘. 하지만 집이 텅 빌 게 아뉴. (울음을 억제할 수 없이 터뜨리며) 맘 편히 살 수 있어! 빚도 갚았다우...이젠 맘 놓고 살 수 있는데...”

이것이 끝.

PS.밀러는 191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빵집 배달원, 자동차 부품 회사 점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미시건 대학에 입학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심장마비로 현실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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