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체제 조기졸업을 위해 실시장에선 '미완의 경제관'
18일 서거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임시절 '국민의 정부' 최우선 과제는 전 정권인 'YS 문민의 정부'가 물려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조기졸업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조기극복이란 성과를 기록했지만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고 DJ 경제관의 상징인 '대중(大衆)경제론'과도 다르게 흘러 갔다는 분석이 교차하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줄곧 DJ를 따라다녔던 별칭은 '준비된 경제대통령'이었다. 그가 이런 별칭을 갖게 해준 데에는 '대중경제론이'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민의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시일이 더 지나봐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정작 대중경제론은 김 전대통령의 부임시절 제대로 펴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이와는 다른 방향의 경제정책으로 흘러갔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5년이란 한정된 임기내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해야 하는 '발등의 불'과 같은 과제를 떠안은 DJ 정부가 대중 경제론을 실제 시장에서 펼치기에는 미완의 상태로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상존하고 있다.
'민족경제론'의 저자로 재야 경제학자인 고(故) 박현채 교수 등과 공조를 통해 틀이 형성된 대중경제론은 DJ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판 승부를 벌인 1971년 대선 당시부터 세상에 알려지며 선풍을 일으켰다. 이후 몇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치면서 DJ 경제관의 상징이 돼 왔다.
대중경제론은 대한민국 탄생이후 뿌리깊은 '정부-대기업-은행'의 연결고리의 문제점과 대기업 위주의 수출전략을 비판하고 노동자와 농민으로 대변되는 대중위주의 국내시장 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진보적 색채를 가진 경제관이다.
이러한 대중경제론을 반영해 국민의 정부가 이전 정부들에 비해 복지와 빈곤층 문제에 관심을 보였고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복지예산금액은 2조8512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4.2%였지만 국민의 정부는 임기말인 2002년에는 3배 가까이 늘어난 7조7495억원이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국민의 정부는 행정부내 정부부처로 여성부를 신설해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함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등 취약층 복지에 힘썼다.
교육환경도 개선돼 학교 급식이 전면 실시되고 콩나물 교실로 대변되던 학급 인원도 30명대로 줄어든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속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이의 해결에 매달려야 했다. 결국 국민의 정부는 IMF지원자금 195억달러를 2002년 2월 시작된 공식 임기를 맡은지 3년 6개월만인 2001년 8월 전액 상환하며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임기 첫해인 1998년은 IMF사태로 전년대비 마이너스 6.7%의 성장을 기록했지만 1999년은 전년보다 10.9%나 고 성장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해결이 매끄럽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DJ 정부는 IMF 권고에 순응적이었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했고 대중보다는 대기업, 국내시장 보다는 세계 무역시장 위주로 개편됐다.
국가의 기간이 되는 포항제철과 금융기관을 민영화하고 외국 자본이 진출할 수 있도록 개방이란 카드를 썼다. 부실기업이 정리되면서 많은 기업과 은행들을 대상으로 외국계 자본에 의한 매각과 통합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유입된 외국 자본으로 외환 사정은 급속히 개선될 수 있었지만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기업들 내부에서 진행되며 대량 정리해고 사태가 속출하고 기업과 은행의 독자성도 크게 손실을 입고 말았다.
기업은 해고자 복직과 새로운 직원채용에는 인색한 대신 바로 이때부터 임시로 저임금을 주고 쓰는 비정규직 채용이 쇄도하면서 현재까지도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하나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 비정규직 그리고 실업자로 분화되면서 소득 격차가 커짐과 함께 노숙자와 이혼율도 급증했다.
국민의 정부가 경기활성화를 위해 썼던 카드발행 남발 묵인과 부동산 정책은 차기정권인 '참여정부'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실업자가 늘면서 소비가 줄자 국민의 정부는 소비 부양을 위해 카드사들의 신용카드 남발을 방조했다.
국내 최대 카드사로 군림했던 LG카드(현 신한카드)는 무분별한 카드 발행 남발과 연체 급증 등 고질적인 문제가 터지며 급기야 2003년 11월 사상 초유의‘현금 서비스 중단'과 부도로 점철되며 카드대란이 발생했고 250만명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기도 했다.
분양가자유화와 분양권전매의 허용 등 건설관련 정책은 부동산 경기과열을 낳는 원인을 제공했고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연이어 부동산 값 인상 억제 정책으로 일관했다.
또한 국민의 정부는 부실기업에 20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5년간 투입했다. 공적자금은 결국 국민의 혈세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1997년 211조원이었던 가구부채는 2002년 424조원으로 늘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임기 내내 신속한 처방을 통해 외환위기 조기 극복이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지만 일면으로는 현재 진행형인 문제도 이 시기에서 비롯되는 등 '빛과 어두움'이 분명히 교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