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그들은 무섭지 않았을까

입력 2023-07-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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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비행기는 탈 때마다 무섭다. 허공에 떠 있다는 불안감은 이내 재난 영화의 사고 장면을 어김없이 불러낸다. 이상 기류로 덜컹하기라도 하면, 생각하기도 싫다. 공직 시절 수많은 해외 출장길은 그래서 아득하기만 한데, 7월 10일 중견기업 2세 경영인 16명과 함께 싱가포르로 향할 때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하늘을 날아 외국엘 갔다. 진취적인 기업인들이 맨 앞에 섰을 터다. 나만큼은 아니라도, 무서운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항공 시스템은 열악했고 직항노선이 부족해 공항들을 전전하며 피로는 쌓여만 갔을 텐데,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93달러의 최빈국, 변변한 공장 하나 없는 폐허를 딛고 그들을 날아오르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싱가포르는 명실공히 국제 금융의 허브다. 세계 상위 500대 기업 대부분이 거점을 설치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2위의 제조 강국이기도 하다. 높아진 경제적 위상은 국제 문제 해결의 상징적 위치로까지 싱가포르를 끌어올렸다. 2018년 카펠라 호텔에서 열린 역사적인 북미 간 정상회담은 또렷한 사례다.

말레이반도 최남단의 싱가포르는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서 지정학적 중요성이 크다. 1965년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할 때는 내일을 말하기조차 어려웠지만, 리콴유 총리의 진취적인 리더십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개방, 친기업 정책을 펼쳤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일컬을 만큼 고속성장이 일어났고, 1960년대 500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6만 5000달러에 달한다. 세계 7위 고소득 국가에서 리콴유 총리는 아직도 국부로 불린다.

기적의 중심에는 EDB로 약칭되는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이 있었다. 외국인 직접투자를 촉진하고, 비즈니스 파트너 매칭,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 등 적극적인 유치 전략을 펼쳐 역량 있는 기업과 인재를 불러 모은다. EDB는 이번 방문에도 전체 일정을 동행하면서 구체적인 투자 유치 전략과 프로그램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국립연구기관 ASTAR(Agency for Science, Technology and Research)과 ARTC(Advanced Manufacturing and Technology Centre), 정부 산하 VC 및 창업지원기관인 SG Innovate의 활동과 조직력도 감탄할 만했다.

빈탄 산업단지에서도 놀라움은 이어졌다. 헤드쿼터는 싱가포르에, 인력 공급 및 생산기지 역할은 인도네시아 빈탄이 맡는다. 아세안을 넘어 세계를 수출시장으로 겨냥한 전략이다. 여러 나라 출신 임직원들이 위화감 없이 일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짧은 방문이라 완벽하게 조망하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기업의 높은 위상과 기업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부러웠다. 양도소득세와 금융 이자소득세는 물론 상속세와 증여세도 없다. 법인세는 17%에 불과하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앞다퉈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싱글리쉬라 불릴지라도 영어 소통에도 문제가 없다.

작년 우리나라의 해외직접투자는 771억 7000만 달러였던 반면 외국인투자는 304억 5000만 달러에 그쳤다. 규모 자체는 대단하다. 그러나, 인바운드보다 아웃바운드 투자가 크다는 것은 투자 대상지로서 우리의 매력이 작다는 뜻인 동시에, 해외와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이 감당하고 있는 불공평한 현실을 드러내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세제, 노동, 환경, 금융, 규제 등 제반 분야의 개선이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글로벌 연결망은 더 이상 촘촘해지기 어려울 만큼 밀접하다. 대한민국을 향한 비행기가 붐비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모래주머니를 떼어 낸 기업인들이 가벼운 스텝으로 경기장에 오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Young CEO라고 부르는 중견기업 차세대 리더들도 여전히 세계를 종횡한다. 세련된 비즈니스 매너와 여유를 갖췄지만 절박함은 다르지 않다. 고색창연한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충정은 아닐지라도, 쿨한 경쟁과 협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풍요를 더하려는 사명감에는 차이가 없다.

공항 대합실에서 쪽잠을 이어간 아버지 세대의 열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쫓아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들과 같은 비전을 가진 세계의 기업과 인재들을 오히려 끌어와야 한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도, 할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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