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노인과 은행나무

김영의 STI MOBILE 대표

바람이 불 때마다

퓨즈 나간 전구들이 즐비했다

하나 혹은 둘 셋 여섯 우르르

깨어진 전구들이 길 위에 점자로 서서

해진 살집을 안고 흰 뼈를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지독한 냄새를 마지막 불씨인 양 훤히 치켜들고

지난날 봉화산 기슭에 피던 횃불처럼 손을 잡고 있다

퓨즈 나간 전구들이 붙박이 아우성으로 일어서고 있다

시대의 검은 봉투 속에 살던 노인이 점자를 읽고 있다

한 자 한 자

그때 물결무늬 바람은 소용돌이 치는 구릿한 냄새 속

햇살 전각된 노란 가오리떼만이 노인을 정답게 따르고

사람들은 오지 말아야 할 길을 온 것처럼 비껴 걷는다

퓨즈 나간 전구들이 붙박이 아우성으로 일어서는 아침

게양된 태극기 아래 곧게 선 노인과 은행나무 한 그루

나란히 가슴에 손을 얹고 떨어진 편종소리 다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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