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멘토,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철학과 교수이던 1960년대 초에 한국 에세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집필하며 에세이스트로 데뷔했다. 이후 다양한 사색과 서정을 담은 에세이들로 어지러웠던 시절을 지탱하는 단단한 기둥이 되었던 김 교수의 글을 읽으며 20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제 60대에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아흔을 훌쩍 넘긴 김 교수는 낯선 시대를 맞이하며 다시금 방황하고 있는 세대의 영원한 멘토로서, 처음 에세이를 펴낸 그 시절처럼 단단한 울림을 활발하게 전파하고 있다. 1920년생, 올해로 아흔다섯 살이 된 김형석 교수가 말하는 행복론을 통해 한 세기 가까이 축적된 지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이다. 그의 말씨에 요즘 듣기 힘든 평안도 방언이 섞여 있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러한 김 교수의 말은 자연스럽게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아흔다섯 살이라는 나이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최근에 신간 <인생이여 행복하라>를 발간했다.
김 교수가 책과 강연을 통해 던지는 화두는 ‘행복’이다. 행복은 사실상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넘게 고민해도 행복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삶에 있어서 행복은 하나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소유를 많이 늘림으로써 즐겁게 살겠다’가 행복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만, 소유란 결국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인격이야말로 행복을 만드는 열쇠
김 교수는 행복의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눴다. 하나는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온,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다.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고 그 행복이 다른 사람의 인격에 전달되고 그 인격이 쌓여 우리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인격은 행복을 창조하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괴테의 말을 빌려 ‘가장 값있게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행복을 창조해내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선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여기서 ‘복’이란 곧 행운입니다. 행운은 노력을 안 하고 주어지는 거예요. 또, 우리는 누구를 위로할 때 흔히 ‘팔자가 그런 거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팔자라는 개념도 행운입니다. 행운은 공짜로 오는 걸 말해요. 그런데 공짜란 누군가가 준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토픽들을 통해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중에 행복한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복권 당첨에는 자신의 노력이 담겨 있지 않다. 김 교수는 행복은 스스로 도야할 수 있는 인격과 비례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단순한 즐거움은 행복이 아니다
“즐거움과 행복을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가치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려고 하니 본인이 사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양하는 게 미안하니까, 전경련 회원들을 초청해서 대접을 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 오래되고 귀한 프랑스 와인을 접했다고 하더군요. 저 같은 사람은 가난한 데다 그런 걸 마실 기회는 없겠죠. 하지만 그건 행복이 아닌 즐거움에 속하는 겁니다. 시인이 시를 창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 각자가 학문을 추구하여 얻는 깨달음의 행복,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렸을 때 성취로서의 행복은 받기만 하는 이들이 경험하지 못할 것들입니다.”
김 교수는 단순한 즐거움이란 행복이 아니며 가치 있는 즐거움이나 보람 있는 즐거움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흔히 전제조건 없이 주어지는 걸 별 생각 없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무언가를 받게 되는 게 아닌, 무엇을 하게 되면 그 행위보다 더 귀한 걸 얻는 방법이 옳다는 김 교수의 설명에는 그가 믿는 행복의 비밀이 들어 있었다.
“행복을 선한 노력의 대가이자 가치 있는 삶의 결과라는 걸 받아들여야 행복에 대한 가치관과 삶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행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김 교수에게 “언제부터 행복하셨어요?”라고 물어봤다. 이쯤이면 나와야 하는 당연한 질문 같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우문이었고, 김 교수는 현답으로 응수했다.
“사람들이 흔히 ‘언제부터 행복했는가’라고 묻는데, 행복은 현재에 있는 것이에요. 과거는 추억하는 것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미래는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행복이 될 수 없어요. 행복은 항상 현재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함께 들어와서 값있게 느끼는 것, 그래서 삶 자체가 충실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입니다.”
그는 행복을 주관적인 행복과 객관적인 행복으로 나눴다. 주관적인 행복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말한다. 객관적인 행복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남겨진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나서 나이가 들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를 무엇을 기준 삼아 느낄 수 있을까요? 바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가’가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한 사람을 우리는 ‘행복했다’라고 보기 어렵죠. 명예를 사랑한 사람, 그 명예가 없어지면 불행해지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김 교수는 자신도 철이 없을 때는 칭찬 받고 박수를 받으면 좋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인기는 연예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사회지도자들까지도 인기를 노리고 사는 걸 보면 ‘저건 아닌데 싶다’고 개탄했다.
“인생은 간단해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는 인간의 목적을 말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방법과 과정을 말하죠.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 윤리학으로 얘기하면 인간애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되도록 노력하는 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면 불행해지는 사람이란 자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는 어리석은 군중의 한 명이 되는 사람이고 남이 가면 따라가는 사람이죠.”
국가와 민족, 사회를 생각하는 행복론이 필요
김 교수의 행복론은 돈이나 명예, 단발적인 즐거움이 아닌 진정으로 커다란 가치를 우선해야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김 교수는 그 큰 가치가 국가와 민족, 사회로 뻗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고 손기정 옹의 일화를 꺼냈다.
“지인 중 한 분이 손기정 옹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이 상금을 받았는데, 상금에 대해서 세금을 내려고 세무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무사가 상금으로 받은 돈이고 신고를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랬더니 손기정 옹이 그럴 순 없다면서 세금을 내고 싶어서 제 지인을 찾아왔던 겁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데’라고 말하면서 세금을 어떻게든 더 내려고 했다더군요. 나라가 없는 시절을 사신 분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지금 정치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잃어버린 게 그런 마음이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한 번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크리스천 실업가가 그렇게 세금을 안 냈나 봐요. 그래서 세무서에서 압수하러 집에 갔더니 현금이 굉장히 많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돈을 세금으로 받으려고 압수하려고 하니 그 실업가의 아내가 ‘그 돈은 교회 헌금으로 낼 돈이니 가져가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더군요(웃음).”
김 교수가 들려준 일화는 이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어려움도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사회를 흉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비판했다.
“우리 사회가 복잡하고 어려운 게 많이 있는데, 손기정 옹이나 고당 조만식 선생 같은 분들이 품었던 마음이 다 없어져서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민족의 행복, 국가의 희망을 먼저 걱정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을 찾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게 잘못이란 걸 잘 몰라요.”
김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30년의 시간을 회고했다. 교수들 가운데 대부분은 ‘내가 연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반면 ‘무엇을 받을까’는 열심히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받을까’만 생각한 사람은 학교에서 버림받았다.
“큰 생각을 갖고 산 사람들은 버림받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정치나 기업, 교육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큰 생각을 못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지도자들까지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면 국가에 희망이 없죠.”
인생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내 손해
“저는 아흔 살이 넘으면서 ‘인생을 즐겁게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내 손해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 분야는 바로 ‘교육’이다.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로 벌써 새로운 원고에 착수했다는 그는 인터뷰 당일에도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현재 김 교수의 자녀들 중 세 가정은 서울에서, 세 가정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김 교수는 자연스럽게 한국 교육과 미국 교육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게 됐다. 김 교수는 한국 교육에서 가장 걱정되는 1순위로 어머니들을, 2순위로 교사들을 꼽았다.
“우선 우리나라에는 교육부가 없었으면 좋겠고(웃음). 이번에 내는 책은 한국과 미국 교육을 비교하면서 만들고자 해요.”
외손자를 통해 본 한국의 교육
김 교수는 미국에서 사는 외손자가 겪은 일을 들려줬다. 손자는 동양인이니만큼 체력에서 서양 아이들에 비해 열세일 것 같았다. 그래서 김 교수는 자신보다 드센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자랄 외손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김 교수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내 상장 받은 거 보여줄까?”
며칠 전 운동회가 있었는데 손자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상하다 싶어서 상장을 살펴봤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제일 열심히 뛰어서 이 상을 준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잘한 게 아니라 노력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상을 준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생이란 그런 간단한 이슈로도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이후 김 교수의 외손자는 예일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학교의 조정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현재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인 그는 때때로 딸과 함께 외손자에 대해 대화하면서 ‘만약 이 아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그토록 행복했을까’ 되묻는다고 했다. 답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김교수가 느낀 미국 교육의 힘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아이를 바꿀 수 있는 교육의 힘이란 아이에게 행복을 느끼게 만드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김 교수의 외손자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아이를 아이답게, 가치를 가치답게 다룸으로써 가능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긴 해도 그 진정한 정의와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행복이란 먼 곳에서만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다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김 교수의 지혜의 목소리는 여러 울림을 만들며 숙고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