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 산업 미래 재편할 ‘탄소시대’ 개막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 단장

EU 탄소국경조정제 본격시행 눈앞
탄소효율성 따라 가격 경쟁력 좌우
中企, 기술혁신으로 새시장 잡아야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적인 이행 단계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무역질서에 구조적 변화가 예상된다. CBAM은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무역·산업·공급망 전반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국제 환경 규범이다. 특히 EU 시장을 통해 성장 발판을 확보해 온 중소기업들에 CBAM은 피할 수 없는 도전이자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

EU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유럽 그린딜’의 핵심 수단으로 CBAM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글로벌 탄소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별 규제 수준 차이로 인해 탄소 집약 산업이 규제가 느슨한 지역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를 방치할 경우 EU 내부에서 막대한 감축 비용을 부담하는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잃게 되고, 전체 감축 효과도 반감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U는 수입품에 대해 자국 제품과 동일한 수준의 탄소 가격을 부과하는 CBAM을 설계하였다.

CBAM은 2023년 10월 시범 기간이 시작되었으며, 2026년 1월에는 실제 탄소비용을 납부해야 하는 이행단계로 전환된다. 초기 규제 대상은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기, 수소 등 탄소 배출이 높은 주요 산업이며, 장기적으로는 대부분의 제조업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결국 탄소가 곧 비용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CBAM의 핵심은 EU에 수출되는 제품의 생산 단계에서 발생한 탄소량을 산정하여, 이를 EU 배출권거래제(ETS) 가격에 연동해 비용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생산 효율성보다 탄소 효율성에 의해 좌우된다. 이는 기업들에 정교한 탄소 데이터 관리, 공정별 배출 모니터링, 원료 단위 탄소량 산정 등 새로운 행정·기술적 부담을 의미한다. 즉 원자재-부품-완제품 전 과정의 탄소 배출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CBAM은 한국 산업 전반에 큰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철강·알루미늄·전력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은 단기적으로 큰 비용 압박을 받는다. 이미 일부 철강 품목은 EU 수출 시 t당 100유로에 가까운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가격 경쟁력이 민감한 중소·중견 철강 가공·유통업체들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

둘째, 탄소 효율이 높은 기업과 낮은 기업 간 경쟁력 격차가 빠르게 확대될 것이다. CBAM은 탄소 비용 부과를 넘어 기업의 환경·에너지 전략이 곧 수출경쟁력으로 전환되는 상징적 규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글로벌 완성차, 전자, 소비재 기업들은 협력업체 선정 시 탄소 배출량을 핵심 지표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공급망 내 중소기업에도 탄소 감축을 요구하는 연쇄적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CBAM은 장기적으로 국가 간 산업경쟁력 재편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EU·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높은 탄소 가격과 규제를 내재한 무역정책을 통해 환경 기준을 글로벌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국가들의 생산 기반은 점차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결국 CBAM은 새로운 통상 질서이자 산업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작동할 것이다.

우리 중소기업에 CBAM은 부담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오히려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기업은 공정·설비별 에너지 사용량과 배출량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이를 정량적으로 산정할 수 있는 데이터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스마트공장 고도화 사업, 탄소 배출량 측정 지원사업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소기업이 개별적으로 규제 대응을 수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대기업·산업단지·협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탄소 데이터 플랫폼, 장비 공동 활용, 공동회계 시스템 등을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EU 역시 공급망 단위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협력 기반 구축은 필수적이다.

추가적인 기회요인으로 산업별 저탄소 프리미엄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탄소 배출이 낮은 철강 제품, 재활용 알루미늄, 친환경 포장재 등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며 중소기업에게 차별화된 기회를 제공한다. CBAM은 규제이지만 동시에 저탄소 제품 수요를 촉진하는 시장 개방 요인으로 작동한다.

CBAM은 글로벌 제조업과 국제무역 질서를 뒤흔드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다. 탄소 감축 역량이 산업경쟁력의 핵심 조건이 되고, 환경 규제가 새로운 무역 규범으로 자리 잡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중소기업은 이 변화를 위기만이 아닌 기회로 바라보고 데이터 기반 관리·협업·기술혁신을 통해 저탄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