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_이덕환 칼럼] 섣부른 ‘이공계 부활’ 해석 경계를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의대 수시지원 대폭감소 ‘착시’현상
AI·반도체 성장 맞물린 일시적 관심
흔들림 없는 과기·산업 정책 절실해

상위권 수험생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의대 열풍이 한풀 꺾이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작년에 7만2351명까지 치솟았던 의대의 수시 지원자가 올해는 5만1194명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약대·치대·한의대·수의대를 포함한 의약학계열의 지원자도 21.9%나 줄어들었다. 의대의 모집 정원이 의·정 갈등 이전으로 복원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의약학계의 지원자 감소는 이례적이라고 한다.

일부 입시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이공계 부활’을 들먹이고 있다. KAIST를 비롯한 4개 과학기술원의 지원자가 2만4423명으로 작년보다 16.1%나 늘어나서 평균 경쟁률이 14.14 대 1로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 근거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대기업과 연계된 계약학과의 수시 지원자도 8892명으로 작년보다 3% 늘어났다. 수도권의 인공지능(AI) 관련 학과는 3.7%, 지역거점국립대는 6.3% 증가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체 모집인원의 20.1%인 6만5086명을 선발하는 정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학업 지속률의 변화도 강조한다. 4개 과기원의 2024학년도 중도 탈락자가 작년보다 9%나 줄어서 지난 5년 중 가장 적은 243명이었다. 반면에 의약학계열의 중도 탈락자는 1119명으로 큰 폭으로 늘어났다. 서울대·연세대·가톨릭대·울산대·성균관대 등 주요 5개 의대의 탈락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의대 열풍이 잦아들기 시작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의대의 수시 지원자가 29.2%나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의대의 수시 선발인원이 작년보다 33.7%(938명)나 축소됐다. 결국 의대 수시전형의 경쟁률은 25.63 대 1로 작년의 24.47 대 1이나 2024학년도의 24.04 대 1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1년 8개월 동안 계속된 의·정 갈등으로 수험생이 몰려들고 있는 의대의 교육환경은 극도로 나빠졌다. 작년과 올해의 의대 입학생 7500명이 예과 1학년 교육을 함께 이수하고 있다. 예과 1학년 과목을 이수하는 학생의 수가 예년의 3.8배로 늘어난 대학도 있다. 그런 비정상은 예과 2년은 물론 본과 4년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2031년에는 예년의 2.5배가 넘는 의사가 한꺼번에 배출된다. 전공의 수련도 어려워지고, 취업 경쟁도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심각해질 것이다. 당분간 의대 진학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정도로 위험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부의 이공계 집중육성 정책과 반도체 경기 회복, AI 산업 성장세가 맞물려 수험생들이 입시 지원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일부 입시 전문가들의 섣부른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AI 3대 강국’의 요란한 구호를 빼고 나면 정부의 ‘이공계 집중육성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난 정부의 폭압적인 연구비 삭감으로 무너진 기초연구 생태계도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학의 이공계 학과는 지난 정부가 어설프게 밀어붙인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와 ‘글로컬대학’은 물론 새 정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부작용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공지능과 반도체에 대한 일시적인 반짝 관심을 이공계 부활로 확대해석하지는 말아야 한다.

2023년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사탐런’도 입시 전문가들의 ‘이공계 부활’ 진단에 맞지 않는 일이다. 13일에 치러지는 2026학년도 수능에서 사회탐구를 선택한 수험생이 77.3%나 된다. 5년 연속 상승세라고 한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했던 지난 9월의 모의평가에서도 사탐 응시 비율이 56.7%로 지난해보다 상당히 늘어났다. 2028년의 수능 개편을 앞두고 있는 내년에도 사탐런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수험생의 선택을 외면하지 못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상위권 대학들이 자연계 수시전형에도 사탐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다.

자연계 수험생들이 대학의 인문·사회계열 학과를 독차지한다는 교육부의 ‘문과침공’은 이미 시효가 끝나버렸다는 뜻이다. 이제는 거꾸로 20년 전에 걱정했던 수능에서 문과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이 이과 학과를 점령하는 비정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는 현실에서 의대 열풍을 잠재우는 일은 절대 쉬울 수가 없다. 어설픈 선무당 수준의 의료 개혁과 정치적으로 오염된 과학기술·산업정책이 수험생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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