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시즌, 첫 출전 그리고 첫 트로피. 그야말로 도파민으로 가득한 단어인데요. 이 짜릿한 순간을 챙긴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탄생했습니다.
2025 MLB 월드시리즈 마지막 7차전 연장 11회. 스코어는 LA 다저스가 앞선 5대 4. 마지막 수비에서 김혜성은 2루수 미겔 로하스를 대신해 그라운드에 섰는데요. 토론토 블루제이스 알레한드로 커크의 타구가 6-3 병살타가 되는 순간 현장은 폭발했죠. 아쉽게 4가 빠진 6-3 병살타로 공을 만져보진 못했지만 김혜성은 우승의 순간을 즐겼습니다. 단 한 이닝, 단 한 수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한국인 야수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자를 만들었죠.
김혜성의 극적인 우승 반지에 격한 축하를 보내면서도 이를 꼬집는 뒷말은 역시나 흘러나왔는데요. ‘야구계의 이강인’이라고 말이죠. 챔피언의 넓은 마음으로 웃어넘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결코 유쾌하진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트로피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한지 넘치게 알려주는데요.
어떤 이는 단 한 번의 장면으로 반지를 얻고 어떤 이는 수년간 팀을 짊어지고도 트로피를 보지 못하죠. 그렇다고 해서 반지의 가치가 혹은 무관의 시간이 가벼운 건 아닙니다.

손흥민(33·LAFC)은 프리미어리그(PL) 토트넘 홋스퍼 소속이던 올해 5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꺾고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요. 토트넘의 17년 만의 우승이자 손흥민 개인의 16년 프로 커리어 첫 트로피였습니다. 그는 경기 후 “오늘만큼은 나를 레전드라 부르겠다”며 웃었지만 그 웃음엔 오랜 기다림이 녹아 있었죠.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 최초 득점왕, 통산 127골 71도움, 8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커리어에도 트로피는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는데요. 토트넘의 반복된 준우승과 탈락 속에서 그는 늘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로 위로받았죠. 그 위로가 얼마나 쓰라렸는지는 그가 트로피를 쥔 날의 표정이 증명했습니다. 번쩍 들어 올린 트로피지만 그 무게는 16년의 세월보다 무거웠는데요.

그래도 마침내 트로피를 손에 쥔 손흥민보다 ‘코리아 몬스터’ 류현진의 시간은 더 깁니다. 그는 2006년 KBO에 데뷔하자마자 18승 6패, 평균자책점 2.23으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며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이후 2013년 LA 다저스로 이적해 아시아 좌완 투수의 새 기준을 세웠고, 메이저리그 올스타, 사이영상 후보, ERA 1위의 타이틀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우승 반지를 끼지 못했는데요. 200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2018년 월드시리즈 준우승, 그리고 올해 한화 복귀 첫 시즌의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심지어 그가 몸담았던 두 팀,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2025 월드시리즈에서 맞붙는 장면은 더욱 아이러니했죠. 류현진이 떠난 뒤 완성된 두 팀의 왕조 대결을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류현진 시리즈’라 불렀는데요. 특히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첫 그의 우승 반지를 노렸던 터라 현 상황이 더 뼈아팠습니다. 5차전에서 8회초 7번째 구원투수로 등판하며 역전극을 노렸지만 실패했죠.

누군가에겐 너무 먼 트로피지만 일찍 닿은 이들도 있는데요. 이강인은 6월, 인터밀란을 5-0으로 꺾은 파리 생제르맹(PSG)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세리머니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트로피 바로 옆 중앙에서 환하게 웃었죠. 24세의 나이에 벌써 여덟 번째 프로 트로피였는데요.
PSG 구단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그러나 이강인의 자리는 화려하기보다 다소 쓸쓸했는데요. 리그 초반에는 선발 출전의 기회가 많았지만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벤치 멤버로 밀려났습니다. 트로피는 화려했지만 그 무게의 절반은 벤치에서의 기다림이었죠. 그래도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준비의 시간이었는데요. 그가 들어 올린 트로피는 화려한 보상이라기보단 자신이 걸어온 길의 증명이었습니다.

김혜성의 여정도 비슷한데요. 그는 미국 진출 첫 시즌인 올해 마이너리그에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시범경기 부진으로 개막 로스터에 들지 못했지만 5월 주전 2루수 토미 에드먼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았죠. 콜업 이후 빠른 발과 안정된 수비로 데이브 로버츠 감독의 눈에 들었고 내야 유틸리티로서 꾸준히 출전하며 시즌 내내 로스터를 유지했습니다.
비록 출전 기회는 적었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도 와일드카드 시리즈부터 월드시리즈까지 한 번도 엔트리에서 제외되지 않았는데요. 굴러들어온 우승 반지라는 비판 표현이 붙었지만 우승 순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마이너에서 시작해, 수백 번의 훈련과 벤치 대기를 견뎌야만 올 수 있었던 자리였는데요.

어찌 보면 트로피는 노력의 저울이 아닌 셈이죠. 손흥민과 류현진은 커리어의 절정에서 트로피와 가장 멀리 있었고 이강인과 김혜성은 커리어의 초입에서 트로피의 중심에 섰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불공평하지만 그 자리에 선 자격만큼은 스스로 만든 건데요. 비록 순서는 다를지라도 말이죠.
물론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경기장 밖에선 기록이, 안에선 트로피가 모든 것을 정의한다지만 그 정의조차 완전하지 않죠. 때로는 평생의 노력이 한 장면으로 가려지고 짧은 기회가 역사를 만듭니다.

이강인은 벤치에서도 웃을 줄 아는 프로였고 김혜성은 한 이닝을 위해 한 시즌을 준비했죠. 손흥민은 16년의 기다림 끝에 스스로 서사를 완성했고 류현진은 반지가 없어도 이미 한 세대의 전설로 남았는데요.
그러나 이 불공평한 장면 속에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그 자리에 거저 서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