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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서명은 만년필로
입력 2017-10-13 11:03

오바마와 트럼프는 흑인과 백인, 오바마 케어와 트럼프 케어 등 하는 말이나 정책 등에서 세계 최강국 미국의 전·현 대통령이라는 점 말고는 같은 게 없어 보인다. 글을 쓸 때도 오바마는 왼손, 트럼프는 오른손을 쓴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미국 시간) 중소기업과 개인들이 보다 쉽게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방법을 연방기관들이 연구토록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은 오마바 케어를 폐지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서명에 앞서 트럼프는 트위트를 통해 “나는 조속히 펜의 힘을 사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건강보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펜의 힘’(원문 power of the pen)은 서명(署名)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2개 펜을 계속 교체하며 건강보험 개혁법안 서명식에 서명했다. 중요 법안이나 조인, 조약에서 여러 개의 펜을 사용하고 기념으로 펜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사용하는 펜을 보니 오바마의 펜과 같지만 만년필이 아닌 롤러볼펜이다. 만년필이라면 만점, 유성잉크의 볼펜은 0점이다. 왜 만년필은 만점이고 볼펜은 0점인가. 롤러볼펜은 몇 점이나 될까?

‘만년필 이야기’는 종이에서 시작된다. 종이는 기원전에 만들어졌지만, 제조방법이 확립된 것은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환관(宦官) 채륜(蔡倫)이 개량 발명한 서기 105년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엔 370년께, 일본은 610년께 만드는 방법이 전해졌고, 서양에 전해진 것은 751년 이슬람과 당나라가 맞붙은 탈라스 전투 때이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는 크게 패해 약 2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중 몇몇이 제지공(製紙工)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757년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세워졌고, 이라크엔 793년께, 이집트는 960년, 스페인에 도착한 것은 1151년이다. 그 이전까지 이들 지역은 파피루스와 양피지(羊皮紙)를 사용하고 있었다.

▲서명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파피루스는 나일강 하구에서 자라는 식물로 연한 것을 얇게 잘라 서로 교차해 만든 것으로, 영어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이는 아니다. 양가죽 또는 송아지가죽 등으로 만든 양피지는 표면이 매끈했다. 종이보다 질기고 물기에도 강했다. 양피지는 천 년 이상 사용된 전통과 관성이 있었고, 종이는 이교도(異敎徒)가 전해준 물건이라는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값싼 종이가 대세가 됐다.

싼값만이 종이의 장점은 아니었다. 개찬(改竄)이 가능한 양피지에 비해 종이는 고쳐 쓰는 게 불가능했다. 서명까지 한 중요한 문서를 고칠 수 있다면 문제가 아닌가. 양피지는 종이만큼 잉크가 깊이 스며들지 않아 칼로 긁어내면 글씨를 고칠 수 있다. 중세 필경사(筆耕士)들에게는 깃털펜과 잉크통, 잘못 쓴 글씨를 양피지에서 긁어 낼 면도칼이 필수였다. 서명 역시 마음만 먹으면 위조가 가능했다. 반면 종이는 잉크가 잘 스며들어 고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1959년 아이젠하워, 1963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중요 법안에 여러 개의 만년필로 서명하고 나눠 주는 행사를 했다. 1987년 중거리 핵전력 협정에서 레이건 전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서명 후 만년필을 바꾸어 갖기도 했다. 중요 문서의 서명에는 종이에 깊이 스며드는 수성 잉크, 누르는 힘에 따라 변화무쌍한 표현이 가능한 만년필이 가장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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