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쑥밭 재발견

입력 2015-07-2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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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희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관장

연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무더운 계절이다. 한차례 맹렬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면 때를 만난 온갖 잡초들이 쑥쑥 자라난다. 잡초는 농부들에게 전혀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기껏 힘들여 김을 매고, 돌아서고 나면 이내 올라오는 무심한 잡초는 그야말로 원수 같은 상대이다. 종류가 많은 잡초 가운데에도 쑥은 유난히 골칫거리인 잡초 중 하나이다. 쑥은 생장 속도도 빠르고 성질도 강건하여 순식간에 무리를 이루고 자라나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이렇게 쑥이 무성한 곳을 우리는 ‘쑥밭’ 혹은 ‘쑥대밭’이라 일컫는다. 쑥밭의 사전적 의미도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거친 황무지로 나타나 있다.

쑥 종류는 세계적으로 250종가량 분포하는데 극지방이나 일부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쑥을 비롯해 무려 24종의 쑥 종류가 자생한다. 쑥 종류는 우리나라에서 높은 다양성을 나타내는 식물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쑥 종류는 국화나 구절초, 감국 등과 같은 다른 국화과 식물과는 달리 꽃의 관상 가치도 없고 달콤한 꿀이나 향기도 지니지 못했다. 생태적인 성질도 강한 햇빛과 건조한 조건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정의 매개체인 곤충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결국 대부분의 쑥 종류는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수정되는 풍매화(風媒花)인 것이 특징이다.

폐허가 되거나 토양 환경이 크게 훼손된 척박지에서도 쑥 종류는 번무할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햇빛이 잘 드는 벌판을 좋아하는 쑥은 빠른 생장과 대량의 종자 산포 능력으로 금방 큰 무리를 이룰 수 있다. 소위 쑥밭이라 부르는, 오직 쑥만이 무성하게 자라는 순군락이 형성된다. 자신의 무리 속에 다른 식물의 침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쑥만 자랄 수 있는 데는 쑥이 발산하는 독특한 화학물질 때문이다. 식물의 뿌리를 통해 내놓는 화학물질은 다른 식물의 생장을 억제하거나 때로는 죽이기도 하며, 학술적으로는 타감작용(allelopathy)이라 한다.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식물들 간에도 화학물질을 통해 생존을 위한 처절한 생존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쑥 종류는 치네올(cineol)이라는 정유 성분을 지니고 있어 특유의 향기가 있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식용, 약용 등으로 많이 이용했다.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쑥은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식물이다. 요새는 쑥떡이나 쑥국과 같이 봄철의 별미로만 맛을 볼 수 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옛날에 쑥은 귀중한 구황식물이었다. 쑥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찮은 식물로 인식되고 있으나 예부터 민간약 및 생약으로 널리 이용돼 온 식물이다. 말린 쑥은 한방의 뜸(灸)요법에서 귀중한 재료로 사용되며 다양한 용도의 생약재로 이용되고 있다. 서양에서도 쑥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식물로 인식돼 수정 구슬과 함께 점성술에 이용되거나 약초로 복용되었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불임이나 부인병에 효과가 있는 약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쑥(Artemisia princeps)에 붙여진 학명은 부인병에 유효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쑥의 속명 ‘Artemis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탄생과 다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에서 유래하였다.

최근 자생 쑥 종류의 다양한 효능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새삼 주목받고 있다. 수도권의 한 지역에서는 쑥을 인공적으로 재배해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적도 있다. 쑥을 원료로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가공한 건강기능성 식품이 판매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세계는 생물다양성협약을 통해 생물유전 자원뿐만 아니라 전통 지식에 대한 주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민족의 긴 역사만큼 풍부하게 축적된 전통 생물자원에 관련된 광대한 지식에 대해 시대에 맞는 재해석과 자원화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앞으로는 길가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한 포기도 무심하게 지나치지 말고 식물에 얽힌 유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박태진 기자 tjpi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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