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숙명의 라이벌 막전막후]바람처럼 성장한 ‘나이키’… 마케팅 실패 쓴맛 본 ‘리복’

입력 2013-04-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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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나이키 vs 리복

◇나이키, ‘도전하는 이미지’ 브랜드 가치 확립

미국 스포츠업계의 선두주자 나이키가 30여년간 이어지고 있는 경쟁에서 리복을 누르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나이키는 후원과 마케팅 전략에서도 앞서거며 세계 최고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나이키는 지난 1964년 창립된 이후 스포츠 유명 인사들을 앞다퉈 후원하고 있다.

리복과 비교할 때 스포츠 브랜드인데다 유명 운동선수를 후원하는 마케팅 전략은 같지만 업계에서는 두 업체가 크게 다르다고 평가했다.

육상선수를 지낸 필 나이트와 오리건대 육상코치 빌 보워먼은 1964년 일본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러닝화를 수입해 판매했다.

당시 회사의 이름은 ‘블루리본스포츠(RBS)’였다.

이후 두 사람은 1972년부터 직접 신발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나이키 사명은 그리스 여신 니케(Nike)에서 따왔다.

로고는 ‘스우시(Swoosh·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로 정했다. 나이키는 한 미대생으로부터 35달러에 로고를 샀다.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는 현재 150억 달러로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26위에 올랐다. 스포츠업계에서는 1위다.

나이키에게 도약의 발판이 된 ‘와플트레이너’는 보워먼의 아내가 사용하는 와플 굽는 틀에서 착안해 탄생했다.

와플 무늬의 고무 밑창이 달린 신발은 탄력성이 매우 뛰어나 나이키에 성공을 안겼다.

나이키가 리복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끈 스타는 미국의 유명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다.

나이키는 조던을 위해 ‘이노베이션 키친’을 만들고 30여명의 디자이너를 투입해 ‘에어조던’을 선보였다. 나이키는 색이 들어간 농구화를 신을 수 없다는 NBA 사무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매경기 1000달러의 벌금을 내면서 조던에게 에어조던을 신도록 했다.

조던 효과는 나이키에게 연간 10억 달러의 매출 증가라는 대성공을 안겼다.

업계는 나이키가 조던을 대표 후원선수로 지정하면서 스포츠 영웅을 탄생시킨 것은 물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자사의 대변인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조던뿐만 아니라 타이거 우즈 역시 나이키의 대표적인 스타 마케팅 사례라는 평가다.

나이키는 1996년부터 우즈를 후원했고 이로 인해 나이키골프의 옷·모자·골프용품 판매가 크게 증가했다.

나이키는 미국 프로 테니스 선수 안드레 애거시· 존 매켄로·피트 샘프라스 등도 후원 선수에 포함시켰다.

전문가들은 나이키가 이같은 후원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최고의 선수가 쓰는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것은 물론 승리·열정·도전의 브랜드 이미지를 쌓았다고 진단했다.

나이키는 마케팅에서도 제품 자체의 광고보다는 소비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전략을 택한다.

지난 1988년 선보인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슬로건은 제품을 조명하는 대신 사용자를 부각시키며 도전정신을 고취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를 통해 나이키 브랜드만의 가치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키는 ‘경쟁자는 제품을 베낄 수 있다. 하지만 브랜드는 따라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나이키는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페이스북·트위트 등에서 나이키가 언급된 횟수를 조사한 결과, 141만3763건을 기록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는 리복의 8만2515건보다 17배 많은 것이다.

◇리복, 잇딴 마케팅 실패… 소비자에 외면

리복이 다시 세계 1위의 고지에 오를 수 있을까. 리복은 지난 30여년간 나이키의 최대 경쟁자로서 자리매김했지만 혁신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다.

리복은 1985년 조셉 윌리엄 포스터가 최고의 육상선수를 위한 수제 운동화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스파이크가 달린 러닝화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후 창업자의 손자 2명이 아프리카 영양의 이름을 따 리복이라는 상호의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리복이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데는 스포츠용품 유통업자인 폴 파이어맨의 역할이 컸다.

파이어맨은 1979년 리복의 북미 판매권을 손에 넣으면서 리복의 운동화를 세상에 알렸다.

특히 1982년 리복은 최초의 여성용 에어로빅화 ‘프리스타일(Freestyle)’을 출시하며 당시 업계를 선도하던 나이키·아디다스 등을 단숨에 따라잡았다.

미국의 에어로빅과 피트니스 붐의 가속화와 함께 리복은 여성용 스포츠화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87년 처음으로 나이키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키가 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마이클 조던 등 스타급 운동선수들을 후원하며 이미지 관리를 하는 동안 리복은 새로운 전문경영인들이 제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파이어맨이 다시 경영에 복귀해 NBA 슈퍼스타 샤킬 오닐과 후원 계약을 맺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지만 가격 정책과 마케팅 실패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리복은 당시 유명 농구선수 샤킬 오닐을 전면에 내세워 샤크 어택을 출시했지만 10대를 겨냥한 제품임에도 130달러에 달하는 높은 가격과 당시 유행하던 검정색 대신 흰색 제품을 내놓으면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리복이 후원한 선수들의 성적이 나이키가 후원한 선수들에 미치지 못한 것도 매출 부진으로 이어졌다.

또한 리복은 당시 시장 점유율 1위였던 스포츠화 전문 대형 소매업체인 풋로커(Foot Locker)와의 제휴에도 실패하면서 유통망 확보에서도 나이키에게 밀렸다.

결국 리복은 지난 2006년 아디다스 그룹에 35억 달러에 매각되는 굴욕을 겪었다.

리복은 아디다스에 인수된 이후에도 매출이 매년 감소세를 기록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리복은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의 판매 부진과 아이스하키 시장에서의 마찰, 인도 사업부의 회계부정 사건 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면서 매출이 18%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아디다스 브랜드의 매출이 10% 증가했음에도 리복의 부진으로 아디다스는 2억6500만 유로의 손실을 기록했다.

아디다스는 리복 브랜드에 대해 여전히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헤르베르트 하이너 아디다스 CEO는 최근 “우리는 확실히 실망했다”면서도 “그러나 리복이 안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디다스는 리복을 부활시켜 테일러메이드와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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