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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4차 산업혁명] 어깨 무거워진 과학기술계
입력 2019-09-09 05:00
가천대 교수, 전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

정부가 최근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은 규모의 확대뿐만 아니라 그 내용 측면에서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예산에서 최대 수혜부문이라 할 수 있는 정부 연구개발(R&D)에 관계하는 전문가들은 어느 때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해 지난 2년간 최저임금을 29% 인상했다. 그러나 소득 하위 20% 그룹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작년 1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6분기 연속 감소했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예산으로 소득을 보전해주려 하고 있다. 이는 내년도 예산이 513조5000억 원으로 올해보다 9.3%, 43조9000억 원 늘었는데, 그중에 20조6000억 원이 보건·복지·노동 예산이라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정부 예산은 2017년 400조 원을 돌파한 뒤, 3년 새 100조 원 이상 늘어나게 된 셈이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진보 정권의 속성상 예산 확대는 정해진 길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팽창예산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미흡한 실적을 만회하려는 재정 주도 성장 정책으로의 선회를 의미한다는 분석도 있다. 2023년도 예산이 600조 원을 넘을 것이란 전망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해 준다.

예산의 성격을 좀 더 들여다보면, 내년도 예산은 한마디로 ‘만물상 예산’이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선거 예산’, 경기침체를 벗어나려는 ‘경기대책 예산’, 한일 경제마찰에 대응한 ‘수출 지원 예산’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정책 예산’ 등 정부로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출항목이다. 이 만물상 예산에 두루 걸쳐 있는 게 연구개발 예산이다.

내년도 예산에서 가장 큰 증가율을 보인 것은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부문(전년 대비 27.7% 늘어난 23조9000억 원)이고, 다음이 연구개발 부문(전년 대비 17.3% 늘어난 24조1000억 원)이다. 올해 처음으로 20조 원대에 진입한 연구개발 예산은 상당 기간 답보상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어왔다. 과학기술계에선 재정압박 속 연구개발비 긴축이란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예산기조를 팽창 쪽으로 바꾸면서 과학기술계는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된 셈이다.

이제 과학기술계는 늘어난 연구개발 예산에 걸맞은 성과를 내 국가에 보답해야 할 엄중한 책무를 안게 되었다. 예산 20조 원 시대에 대응한 과기계 역할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우리나라는 최근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다. 과기계는 경기침체, 경제마찰 그리고 기술냉전에 휘말려 경제와 안보가 하나로 묶여지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나라를 건져야 할 주요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당장은 일본과의 ‘소부장’ 다툼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는 일이고, 다음은 ‘소부장’에서 굳건한 경쟁력을 갖는 책략이다. 단기와 중장기 연구개발 로드맵을 한시바삐 만들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특공작전이다. 이것만으로 ‘모노쯔쿠리(장인정신에 바탕한 제조기술) 대국’ 일본을 능가하기는 쉽지 않다.

기술경영 전문가들은 일본과 경쟁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아예 새로운 싸움판에서 글로벌 경쟁을 하는 투트랙 전략을 권한다. 새 싸움판이 바로 제4차 산업혁명이 일으키고 있는 시장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로봇, 드론, 자율주행 자동차, 핀테크, 블록체인, 클라우드 서비스,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시티, 바이오 의료,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우리 생활에 전방위로 침투하고 있다. 기술혁명으로 인한 미래에의 대분기(大分岐)다. 이 전환점에선 어느 나라든 스타트 라인에 서 있다. 지금은 모든 경쟁의 중심은 AI에 쏠려 있는 모습이다. 국내 대학과 연구계도 출전 채비를 갖추고 있고, 정부는 10월 중 ‘AI 국가전략’을 발표할 예정이다. AI는 과학기술계의 동력을 일으키는 하나의 기폭제다.

지금부터 과학기술계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증거 기반의 연구개발’, ‘과제해결형 연구개발’, ‘보답하는 연구개발’의 3원칙을 밀고 나가야 한다. 정부는 과기계가 잘 뛰도록 ‘간섭 억제’, ‘실패 용인’, ‘소통 강화’의 3원칙을 지켜줘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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