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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리포트]유럽보다 30년 늦은 워라밸…근무문화부터 변화해야
입력 2018-08-10 10:39   수정 2018-08-10 11:14
주 52시간 근무 시대 ‘일과 삶’ 균형 맞추기…개인 생활 만족도 끌어올리는데 주력을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휴식은 사치였다. 가족들의 굶주림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일에 매달렸고, 어머니는 그 월급을 쪼개 살림을 꾸렸다. 집 한쪽에 애지중지 쌓아놨던 연탄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해외여행은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58년 개띠’들은 그런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10명 중 7명은 돈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무엇을(What) 위해 사는가’를 넘어 ‘어떻게(How) 행복해질 것인가’를 고민한다. 곳간을 책임지는 가장조차 월급보다 ‘칼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다. 이 같은 트렌드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바로 워라밸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이 단어는 고령화·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까지 논의되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그 시작점이다. 하지만 제도에 머물러선 안 된다. ‘꼰대’와 ‘어린 것들’의 이념적 틈을 어떻게 좁힐지 논의해야 한다. 문화 말이다.

◇유럽보다 30년 뒤처진 한국 워라밸 = 최근 보험연구원이 내놓은 ‘국내·외 워라밸 트렌드와 시사점’에 따르면 유럽은 1990년대 초부터 고용률을 높이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워라밸에 대해 논의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성 평등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김 연구원은 “워라밸은 일과 건강·여가·인간관계 등을 아우르는 개인 생활과의 균형을 뜻하는 말로써 일하는 방식과 형태 변화를 포함한다”며 “국내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한 일·가정 양립 차원에서 시작해 저출산·고령화 문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보다 30년 가까이 뒤처진 한국 워라밸. 이는 수치로 드러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베터 라이프 인덱스’에 따르면 한국의 워라밸 지수는 10점 만점에 4.7점에 불과하다. OECD 35개의 회원국 가운데 32위에 머물고 있다.

워라밸 지수는 OECD에서 ‘더 나은 삶 지수’를 산출하는 항목 중 하나로 △장시간 근무하는 노동자 비율 △하루 중 자기 관리·여가에 활용하는 시간으로 측정한다.

점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네덜란드로 9.3점이나 된다. 덴마크(9점), 프랑스(8.9점), 스페인(8.8점), 벨기에(8.6점)가 뒤를 잇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시간 근무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낮은 나라는 네덜란드(0.15%), 스웨덴(1.11%), 라트비아(2.09%), 덴마크(2.2%) 순이다. 한국은 20.84%로 OECD 평균(12.62%)을 크게 웃돈다.

하루 중 자기 관리·여가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은 프랑스(16.36시간)다. 스페인(15.93시간), 네덜란드(15.90시간), 덴마크(15.87시간) 등도 15시간 넘게 쉬고 있다. 한국은 14.70시간으로 OECD 평균(14.90시간)과 비슷하다. 김혜란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대체로 장시간 근무하는 비율이 낮은 나라일수록 워라밸 점수가 높다”고 말했다.

◇워라밸 시작점, 주 52시간 근무제 = 유럽연합(EU)은 1993년부터 연장 근무를 포함한 주당 근로시간을 최장 48시간으로 제한했다. OECD 국가 중 근무시간이 짧기로 유명한 독일은 1995년부터, 자유와 낭만을 즐기는 프랑스는 2000년부터 각각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시계열을 최근으로 가져와 보자. 독일의 최대 노조인 IG 메탈(금속노조)은 올해 2월 근로시간을 ‘주 28시간’(기존 주 35시간)으로 단축하기로 했다. 덴마크는 코펜하겐시 보건·복지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던 유연근무제를 다음 달부터 공무원 1만 명에게 단계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김 연구원은 “독일의 IG 메탈은 주당 근로시간을 줄이는 데 찬성하면서 임금 인상(6.8%)을 거절했다”며 “돈보다 워라밸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법정 근로시간 40시간과 휴일근로를 포함한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해 주당 52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초과하면 사업주는 징역 2년 이하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시행된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아 곳곳에서 잡음이 새어 나오고 있지만, ‘저녁 있는 삶’을 위한 취지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대안으로 유연근로제를 논의하고 있다. 유연근로제란 사용자와 근로자가 각자 필요에 맞게 근로시간을 자유자재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제도다.

‘삶의 질’을 평가하긴 이르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일자리는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고용노동부가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대상인 300인 이상 사업장 3627곳의 실태를 알아본 결과 813곳(22.4%)이 신규 채용 계획을 세운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사업장에서 9775명의 신규 채용이 완료됐고, 2만36명을 채용하는 과정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근무문화 등 질적 개선 뒤따라야” =전문가들은 이제는 제도를 넘어 근무 환경의 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근무시간을 단축해 워라밸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OECD의 워라밸 순위를 다시 보자. 1위 덴마크와 3위 네덜란드 여가는 각각 8.8시간, 8.7시간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근무시간은 네덜란드가 6.1시간으로 덴마크(6.6시간)보다 30분 더 짧다. 심지어 2위인 스웨덴은 8위 독일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짧게 쉰다.

이유는 뭘까. 덴마크에는 휘게(Hygge)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락함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소박함과 간소함에서 행복을 찾는다. 어떻게(How) 사는지에 대한 고민, ‘웰빙’과 일맥상통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피카(FIKA)를 즐긴다. 하던 일을 완전히 멈추고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휴식이며, 사회적으로 용인된 공백이다.

김 연구원은 “근로 문화를 개선하고, 개인의 생활 만족도를 끌어올려야 한다”며 “정부는 물론 기업과 근로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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