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20. 이예순(李禮順)

입력 2017-10-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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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결정적인 역할 한 왕실 비구니

이예순은 평산부사 이귀의 딸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자점의 아우인 유학(幼學)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두 사람은 혼인 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 함께 불도를 닦는 도반(道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김자겸에게는 오언관이라는 서얼 출신의 친구가 있었는데, 오언관은 김자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부부와 함께 수행을 하고 불법을 논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김자겸은 1608년(선조 41) 세상을 떠나면서 오언관에게 “내가 죽더라도 집에 드나들며 내 아내와 불도를 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수년간 오언관은 이예순의 집을 드나들며 불경을 가르쳐 주었다.

1614년(광해군 6) 오언관이 경상도로 낙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예순은 함께 덕유산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이예순과 오언관의 간통사건으로 둔갑해 공초까지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오언관이 강변칠우 사건(광해군 대 명문가의 서얼 7명이 조령에서 은상(銀商)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한 사건)의 범인인 박치의로 오인돼 잡히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오언관과 함께 이예순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예순의 아버지 이귀는 서인에 속한 정치인이었는데, 광해군 대 북인세력은 딸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이귀를 극렬하게 공격했다. 의금부에서 공초를 받던 중 오언관은 극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이예순도 처형될 뻔하였으나 광해군에 의해 방면되었다.

그 후 이예순은 왕실 비구니원인 자수궁에 머물렀고, 광해군 부인 유씨와 김개시 등의 왕실 여성들로부터 생불로 칭해질 정도로 깊은 신망을 얻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예순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이라 일컬으며 신봉함이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김개시와는 모녀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다.

하지만 이예순은 광해군의 반대편에 서서 광해군을 내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귀와 시아주버니 김자점은 서인세력을 규합해 광해군의 폐위를 도모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눈치 채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자, 이예순은 광해군의 측근인 상궁 김개시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김개시는 이예순의 부탁을 받은 직후 광해군에게 충신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잘못된 조언을 던졌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 등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였고, 반정세력은 거사 시일을 앞당겨 인조반정을 성사시켰다.

이예순이 인조반정이 비밀리에 추진되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실 내에서 존경받는 비구니로 활동하였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수완이 좋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후대의 기록에는 인조반정 이후 이예순이 인목대비의 시주를 받아 동대문 밖 청룡사를 중창하였고,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불사를 주도하였다고 전해진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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