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착한 바람 못된 바람

입력 2017-08-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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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추억을 부른다. 삼복(三伏) 더위가 물러선 이맘때면 방역차(일명 방귀차)가 내뿜던 특유한 냄새가 코끝에 맴돈다. 1970~1980년대 초반 태풍이 동네를 할퀴고 사라지면 방역차가 뭉게구름과 함께 나타났다. 초등학교 육상부였던 나는 방역차 소리(방방방 바아앙~)가 들리면 그 뒤를 쫓아 육상부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돌았다. 선생님은 “방역차 소리를 귀신같이 잘도 알아듣는다”며 허허 웃고는 야단도 치지 않았다. 훈련 때보다 더 빨리, 더 먼 거리를 뛰었기 때문이리라.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하던 아이, 골목에서 구슬치기하던 아이, 엄마 심부름을 다녀오던 아이들도 신이 나 소리를 지르며 방역차 뒤를 달렸다. 낮잠 자는 아이를 깨워 내보내는 엄마들도 있었다. 소독약이 머릿니는 물론 알까지 없애 줄 거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 젊은 엄마들은 기겁할 만한 일이지만, 회충약 살 돈이 부족해 학교에서 단체로 줄을 서서 약을 받아 먹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동네 어른들은 입추(立秋)가 지나면 지붕 등 집안 곳곳을 손봤다. 집중호우와 태풍 때문이었다. 특히 가을 태풍은 매서웠다. 지붕을 손보지 않으면 기왓장이 날아다니고, 나무도 뿌리째 뽑히는 등 동네가 쑥대밭이 되곤 했다. 그런 얄미운 태풍에 사라, 엘리스 등 예쁜 이름을 붙이는 게 어린 마음에 이상했다. 태풍의 이름을 짓는 이가 자신의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대학에 간 이후에야 알았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태풍에 여성의 이름만 붙이는 것은 남녀 차별”이라는 여성단체의 불만은 충분히 나올 만했다. 결국 1978년 이후 태풍은 남자와 여자 이름을 번갈아 쓰고 있다.

태풍에 해당하는 바람은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이다. 건물이 무너지고 바다에서는 파도가 크게 일어 흰 거품으로 뒤덮이게 하는 게 노대바람의 힘이다. 이보다 더 강한 왕바람과 싹쓸바람은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바다에서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킨다. 특히 ‘싹 쓸어버린다’는 의미의 ‘싹쓸이’에서 딴 ‘싹쓸바람’은 이름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태풍급은 아니지만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큰센바람도 강도가 세 사람이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이다.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은 빨래를 잘 말려주고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주는 ‘착한’ 바람이다.

부는 방향에 따라서도 샛바람(동풍), 높새바람(북동풍), 하늬바람(서북·북풍), 갈마바람(서북풍), 된마파람(동남풍), 된새바람(동북풍), 마칼바람(서북풍) 등 나열하기 숨이 찰 정도로 이름이 많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큰 바람은 댓바람, 방향 없이 이리저리 함부로 부는 바람은 왜바람이다.

재미있는 바람 이름도 있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꽁무니바람과 ‘피죽’도 먹기 어렵게 흉년이 들 바람이라는 뜻의 피죽바람이다. 모를 낼 무렵에 피죽바람이 불면 비가 내리지 않아 큰 흉년이 든다고 하니, 그야말로 ‘못된’ 바람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최근 홈페이지 누리집(www.archives.go.kr)에 ‘기록으로 보는 그 시절 여름나기’ 주제의 사진과 영상을 올렸다. 1950~1990년대 여름휴가와 방학 풍경, 태풍으로 인한 수해 복구, 방역활동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끝내선 안 된다.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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